‘여호와 호칭’과 잠언의 주권성 (3)
<지난 호에 이어서>
2. 잠언의 통일 구조에 계시된 주권성
3) 시종(始終) 통찰의 명철: 주권성의 원칙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삼대 언약을 세워주셨다. 그 언약 가운데 나라를 세워 다스리게 해 주시겠다는 통치언약을 이루어 주시려고 다윗을 왕으로 기름 부어 다윗왕가를 세워주신다. 그리고 다윗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을 통해 자기 아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경외하는 명철에 대한 훈계의 잠언을 교훈해 준다. 이는 여호와를 아는 명철이 다윗왕가를 견고히 세워주는 지혜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열조에게 언약하신 삼대언약은 솔로몬왕에게 오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이름을 간직한 성전을 지으면서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여호와를 섬길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고 해서 인간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국가 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지혜와 근신으로 바탕이 놓이더라도 언약 자손이 수립하는 국가 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훈계를 통해 알게 하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증거한다. 이는 지혜의 훈계로 명철을 얻을 때만 왕가를 세우는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왕가를 계승하는 아들들의 명철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전체 역사를 볼 수 있을 때 여호와의 주권성을 깨닫고 찬양할 수 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율법의 계명은 부모 자체의 권위를 존중하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대로 왕가를 세우신 여호와께서 왕가를 세워주신 목적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절대 주권성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절대 주권성을 알려주는 부모가 아니면 왕가를 계승하는 자녀들은 그 진리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어미의 근심이 되고 입에 독을 머금고 행악으로 낙을 삼아 멸망한다,’(잠 10:10-21 참고)라고 할 때, 이는 단지 멸망당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여호와의 주권성을 모르는 무지에 대해 질타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약속의 다윗왕가의 처음과 마지막을 아는 명철을 알게 된 왕은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생존을 위해 사용하지만 명철이 없는 왕은 재물의 노예가 된다. 국민과 국가가 망하더라도 자기 권력과 명성을 쟁취하는 사망의 길을 갈 뿐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솔로몬에게 이미 정해진 왕위 계승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에 따라 반역을 꾀한 아도니야의 최후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므로 여호와로부터 얻는 지혜의 훈계를 받아 명철로써 언약의 왕가를 다스리는 왕은 부모의 훈계를 좋아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을 얻는 데 충실하게 된다. 가령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를 썩게 한다.’(잠 12:4)고 할 때, 이는 부모의 훈계를 제대로 받는 명철이 없을 때 언약의 왕가뿐 아니라 통치자 자신도 반드시 파멸하게 된다는 여호와의 엄한 주권성을 깨닫게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명철을 얻은 의인은 공평하고 정직한 판단을 내리고 백성의 칭찬을 받지만, 명철이 없는 악한 통치자는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하며 왕가를 결국 파멸로 몰아간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왕가의 주권적 통치자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명철을 통해 유의하면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앞에서 비판했던 도덕적 교훈으로 잠언을 주석하는 기존의 성경 해석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자는 왕가 건립을 통해 여호와의 주권성을 아는 명철을 얻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생명의 샘’에 도달한다. 반대로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는 교만한 어리석은 통치자는 사망에 이른다. 이 두 길을 인간이 자기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을 통해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하게 하실 때 신적 절대주권성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결코 아님을 강조하게 한다. ‘여호와의 눈’(잠 15:3)이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므로 지혜의 훈계를 통해 명철을 얻지 못하면 사망과 음부로 향하는 악인의 길이 된다. 하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의인의 행동은 죽음에 직면해도 소망이 있지만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악인은 환난에서 멸망당 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도록 명철을 주는 훈계를 따르면 언약의 왕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여호와의 절대주권성이 계시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 악인도 여호와께서 싫어하는 악이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악한 날에 적당하게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 일시적으로 악인이 득세하여 권세를 얻더라도 여호와의 주권성은 결코 잊지 않게 하신다. 가령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할 때, 이 말씀은 만사에 여호와의 주권성이 미치지 않은 사건이 없다는 것을 강조함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악인이라도 악한 행사를 위해 여호와께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통해 여호와의 주권성을 더 강하게 증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께서는 선한 세력이든 악한 세력이든 창조부터 최후 심판까지 자신의 주권성을 계시하고 언약 자손들로 찬양하도록 하시는 섭리 역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의 훈계를 ‘명철’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도니아는 부친 다윗왕을 배반하고 왕이 되고자 하는 악한 행실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여호와가 보실 때 악이 무엇인지 주권적으로 섭리하기 위해 악한 도구로 사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여호와로부터 명철을 받아 공의와 정직으로 통치한 경우가 솔로몬에게 있다. 그 유명한 솔로몬의 생모 확인 재판 사건이 그것이다.(왕상3:16-28 참조) 이는 솔로몬의 지혜를 칭송하기 위한 예가 아니다. 지혜와 명철의 원천이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께서 모든 공의로운 재판을 주관하는 주권자임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 기록 목적이다. 역사 과정에서는 의인이 악인에게 멸시와 능욕을 당하고 재판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명철이 흐려지지 않으면 다툼과 거짓말로 악행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시종을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성을 의지하게 된다. 미련한 부자는 재물을 견고한 성이라 여기지만, 명철을 얻은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견고한 망대로 여긴다. 그래서 솔로몬은 견책하려면 미련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명철을 얻은 자에게 하라고 권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명철을 얻은 자는 목적이 나라를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경외’가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잠언에서 ‘거짓 교훈과 유혹을 경계하라’(잠언 17장 참조)고 할 때 이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세속 국가와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기 위해 교훈하는 내용이 아니다. 거짓 교훈과 유혹은 바로 국가를 수립하고 그 체제를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성을 깨닫는 명철이 없는 경우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피조세계에서 언약하신 통치국가를 세우기도 하고 패망시키기도 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깨닫고 오직 여호와만 경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혜의 훈계로부터 오는 명철밖에 없다. 가령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9; 25:25)라고 할 때, 이는 이 세상의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처세술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도 빼앗고자 다투지 말고 차라리 헤어져 사는 것이 명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결국 지혜로운 왕은 권력 쟁취와 재물 획득보다 오직 여호와의 은총을 바라보는 명철을 얻는 것이 여호와가 보실 때 영광과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솔로몬은 자기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에게, 다윗 왕가를 세우시는 여호와의 주권적인 능력을 아는 명철로 오직 여호와만을 경외하라는 훈계를 통해, 여호와의 주권성을 찬양한다.[박용기, 『성경강론 8』(서울: 진리의말씀사, 2002), 4323-432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