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칼빈에게 영향을 끼친 스승들
사람은 모두 그 시대의 아들이며, 그가 살아온 주변 환경이나 스승들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게 되어 있다. 칼빈은 말하자면 잘 준비된 그릇이었다. 즉 칼빈은 철저히 준비된 고전어 학자였다. 그가 배웠던 히브리어, 헬라어는 그냥 배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당대의 석학아래에서 그 교수의 댁에 머물면서 배웠고 모국어인 불어보다 라틴어가 더 유창할 정도로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리고 한때 법학도로서의 예민한 분석력을 가졌다.
칼빈은 독서광
칼빈은 위대한 종교 개혁자이지만, 그는 겸손한 학자였다. 그가 겸손한 학자란 말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동시대의 모든 개혁의 동지들까지 신학과 신앙을 깊이 연구했다. 말하자면 칼빈은 독서광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사람을 평가하려면 그가 만난 사람과 그가 읽은 책을 보면 그의 학문과 인격을 알 수 있다. 또한 배우고, 읽고, 본 바를 어떤 시각에서 평가하는가의 잣대도 중요한 것이다. 칼빈은 시대를 뛰어 넘는 방대한 양의 신학과 신앙 서적을 섭렵하면서도 그 비판의 기준은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선배들에게 수없이 배웠으나 진리의 잣대로 취사선택하고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겸손히 엎드리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역시상 그 어떤 학자들보다 성경에 충실한 개혁자의 자리를 지킨 것이다. 우리가 칼빈 또는 칼빈주의 신앙을 따르는 것은 바로 그의 성경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
칼빈이 도대체 누구의 무슨 책을 읽었을까? 그것은 그의 주저인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인용문들과 주석과 논문집에 나타난 여러 인용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선배들의 책을 열심히 정교하게 읽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교부들의 원전을 독파하다
우선 칼빈은 교부들의 방대한 책들을 섭렵하였다. 칼빈은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암부로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에서 배웠다. 칼빈의 처녀작 「세내카의 관용론」은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 책에는 풍부한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당대의 에라스무스와 붸데의 방법을 썼지만 에라스무스를 뛰어 넘었다. 23살의 풋내기 청년이었으나 당대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특히 칼빈은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을 많이 인용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의 사상들은 칼빈에게 와서 새롭게 재생산되었다. 비판될 것은 비판되고 어떤 것은 더욱 명료하게 발전되었다. 흔히 칼빈의 신학은 어거스틴 신학의 부활이라고 하리만큼 직접 간접으로 그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다는 뜻이다. 필자가 경영하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과 「칼빈 박물관」에는 칼빈의 작품만 아니고 16세기에 출판된 교부들의 원전을 거의 다 갖고 있다. 그런데 칼빈이 이렇게 방대한 책들을 탐독하고 평가하면서 자기 자신의 확고한 개혁주의 신학 정립을 세운 것을 보면 칼빈의 사상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선배 개혁자들의 사상을 섭렵하다
또 하나 칼빈은 선배 종교 개혁자들의 책들과 글을 통해서 엄청난 지식을 획득했다. 칼빈은 제2세대 종교 개혁자로서 앞선 개혁자들의 모든 사상을 탐독하고, 저들과 인간적 교제를 가졌다. 말하자면 칼빈은 선배들을 통해서 배웠으면서도 그것을 체계화 조직화하는 데 명수였다. 그는 침착하고 차분한 학자적 기질에다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성품이었으나 예리한 분석력과 수사학적 재능이 어우러지면서 작품을 써 갔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글이다. 말은 순간적인데다가 시간이 갈수록 변질되거나 잊혀지지만 글은 시대를 뛰어넘고, 세기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 감동을 주고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다. 칼빈의 사상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다. 칼빈은 에라스무스를 비롯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학자들의 책을 탐독했다. 그런데 칼빈은 인문주의를 배웠고 자신도 인문주의자로 출발했으나 도리어 칼빈은 인문주의적 방법으로 인문주의를 비판하고 인문주의를 극복했다.
루터 없이 칼빈 없고, 칼빈 없이 루터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스승은 아무래도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이다. 흔히 말하기를 「루터 없이 칼빈 없고, 칼빈 없이 루터 없다」고 한다. 필립 샵의 말처럼 루터는 단단한 바위산을 깨뜨린 사람이라면, 칼빈은 루터가 캐낸 바위에 글을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칼빈은 루터를 개혁의 스승으로 생각했고 그와 편지 교환을 했을 뿐 아니라 루터의 저서들을 탐독했다. 루터는 칼빈과는 달리 매우 감성적인데다가 성악가요 부흥사 기질을 가진 설교자였고, 역동적인 성격을 가진 전형적인 독일 남자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있는 약점은 민주주의적인데다가 조직력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이에 반해 칼빈은 루터보다는 감성이 뒤떨어지고 웅변이 없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강한 의지력, 명쾌한 문장력, 예리한 분석력,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성경만이 참된 진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칼빈은 선배인 루터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비판할 것은 당당히 비판하고, 그 자신의 신학적 체계를 세워서 개혁 교회의 부동의 학자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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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칼빈과 그 시대 |
칼빈이 활동한 16세기의 분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