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칼빈과 제네바_08
제네바는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다. 왜냐하면 멀리는 몽블랑이 보이고 앞에는 레망 호수가 있다. 이 도시가 개혁의 도시가 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이 도시가 1536년 개혁자 칼빈을 만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나라에 지도자가 누군가에 따라, 그 도시에 일꾼이 누군가에 따라서 역사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진다. 제네바와 칼빈의 만남! 그래서 교회는개혁되었다. 그리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처음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 왔을 때는 아무도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그를 대수롭게 여겼다. 그러나 중요하고 굵직한 논쟁거리마다 칼빈에게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그는 늘 승승장구했다. 그것 때문에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들으면서도 그는 더욱 강한 의지와 확실한 논증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한 사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 교육의 눈을 뜨게 한 칼빈
첫째로 칼빈은 일찍이 종교 교육에 대한 눈을 떴다. 그래서 칼빈은 자녀들이 종교 교육을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칼빈에게는모든 아이들에게 복음적 신앙의 요점을 철저히 가르치는 훈련 프로그램의 개발이 중요했다. 교회는 학생들에게 요리문답을 철저히 가르칠 뿐 아니라 그것을 시험, 감독, 성과 확인까지를 함으로써, 장래에 제네바 후세대들에게 철저한 복음적 신앙을 심는 것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어린이들을 위한 요리문답을 만들어서 훈련하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이 요리문 답서에 대해서는 의무적으로 아이들이 배워야 하고 모든 시민들이 이것에 서약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제네바 시민의 신앙생활을 완전히 교회의 감독 아래 두게 했다. 이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종교 의회를 구성했다. 물론 칼빈의 교육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반칼빈운동도 일어났다.
제네바에서의 꿈을 이루다
둘째는 칼빈의 도덕적 훈련이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표지에는 이것을 「경건의 대전」이라고 명칭을 붙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다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제네바는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퇴폐적이고 음란한 도시였다. 교리가 아무리 중요해도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이 도덕적 우위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들의 도덕적 훈련! 그것이 칼빈이 제네바에서 이룩하려던 꿈이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새로운 개혁 교회를 세우되 이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 새로운 도덕적인 다수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칼빈의 조직적인 개혁 운동은 시작하자마자 암초에 부딪히고 말았다. 새로운 질서를 반대하고 칼빈의 도덕적 윤리적 실천 운동이 그들에게 불이익을 줄 것이란 생각 때문에 많은 논적들이 나타났다. 특히 카롤리 같은 사람은 공개적으로 칼빈이 삼위일체를 부인한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1537년 5월 로잔느에서 있었던 칼빈과 카롤리의 논쟁에서 카롤리의 비난이 거짓임이 증명되어 축출되는사건도 있었다.
제네바의 성시화를 위한 프로그램
셋째는 철저한 신앙 고백을 제정하여 시민들을 강하게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칼빈은 새로운 개혁 교회를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과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려 했다. 이를 위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결단하게 하고, 만에 하나 거부하면 제네바에서 축출하고, 그것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자만 제네바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칼빈이 요구한 것은 시민 각자가 자신의 믿음에 책임을 갖고 결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신앙이란 자각 있는 개인의 내적 문제였다. 이것은 칼빈의 새로운 운동이었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칼빈은 제네바를 성시화(聖市化)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과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대다수의 시민은 칼빈의 뜻을 따랐지만 어떤 이들은 선서를 거부했다. 시 당국은 선서하지 않으면 추방한다고 결의는 했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시민 중에 반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제네바시에는 소의회와 200인회가 있었는데 위원회에는 칼빈파와 반칼빈파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늘 우리식으로 말하면 의회 안에서 여당과 야당이 있는 식이었다. 의회에 칼빈파와 반칼빈파가 팽팽히 맞서 있었으나 소의회는 중앙의원이요, 최종결정권 기구인데 이때 4명 중 3명이 반칼빈파였다. 일이 그렇게 되니 반칼빈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모든 칼빈의 꿈과비전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의회의 힘을 빌려 칼빈을 제네바에서 축출하는 결정을 했다.
칼빈은 전혀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네바에 입성해서 2년간 사력을 다해서 개혁을 시도 했으나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제네바를 떠나게 된다. 칼빈은 낯선 타국, 낯선 타향에서 참된 개혁 교회 건설을 위한 비전과 꿈을 가지고 마치 야생마와 같은 제네바 시민들을개혁주의 사상으로 물갈이하려 했으나 아직도 제네바는 칼빈의 편도 아닐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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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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