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저술가로서 칼빈_14
요한 칼빈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이지만 또 한 위대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체계적인 인문학의 습작과 수사학의 연구, 법률적인 논리적 전개 등을 배워서였는지 젊은 날부터 글을 쓰는 데 천재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 다. 그는 일찍부터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 희망사항이었다. 거기에는 어학에 대한 천재적 소질이 또한 뒷받침되었다. 유창한 라틴어 실력에다 성경원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교부들의 원전을 막힘없이 통독하였다. 그래서 그는 잘 훈련되고 잘 준비된 당시 고급언어인 라틴어로 자유자재로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마치 바울이 당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이중 언어를 구사했기에 복음의 세계화와 이방인 선교의 위대한 일을 했던 것처럼, 칼빈은 모국어인 불어와 당대의 세계어인 라틴어를 사용해서 개혁주의 사상을 널리 증거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한 확실한 신학과 신앙의 체계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기초로 한 사상 전개에는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논리를 가졌다.
기념비적인 대작 「기독교 강요」는 베스트셀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글이다. 말은 현장에서만 유용하나 글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감화와 감동을 주며 사상과 삶을 변화시키며, 교회와 세상을 바꾸게 된다. 특히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근거로 한 작품일 때 그러하다. 칼빈은 16세기의 종교개혁을 설교와 저술을 통해서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칼빈의 저작은 독창적인 것도 있지만, 교부들의 저작물과 선배와 동지들의 책을 탐독하고 그것을 적절히 평가 비평하고 장점만을 골라 성경의 진리로 다시 엮어 내는 데 천부적이었다.
칼빈의 작품은 크게 대별하면 다섯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즉 첫째는 불후의 명작 「기독교강요」 , 둘째는 「성경 주석」 이고, 셋째는 「설교집」 , 넷째는 「서간집」, 다섯째는 「소논문집」 등이다. 이 중에 성경 주석이나 설교집은 대필한 것이 많이 있으나 결국 칼빈의 천부적인 암기력과 성경 원어 연구에 대한 주해와 설교는 칼빈 자신의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기념비적인 작품은 「기독교강요」이다. 칼빈은 27세의 나이에 이 책을 쓰고 출판한 후에 일약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되었고, 요즘식으로 말하면 그 책은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기독교 강요」는 그의 출세작이 된 셈이다. 1536년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 이래 로마 가톨릭 진영에서는 이 책에 대한 답변서가 아직 없으므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가톨릭에 대한 판정승이요, 개혁 교회의 진리체계를 확립한 최고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강요」는 성경에서 성경으로 풀어 쓴 교의학의 대전
「기독교 강요」는 1536년 초판이 나온 후에 1559년 최종판이 나오기까지 칼빈의 끊임없는 수정보완을 거쳤다. 그리하여 1559년 결정판은 4권 80장 50만자에 이르는 신학 대전이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사상적 전개가 초지일관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조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반대자들도 도저히 수정할 수 없는 유일한 신학적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성경 전체를 가장 면밀히 연구하였으며 어떤 다른 종교 개혁자들보다 구약 지식이 특출했다. 칼빈은 신학적 난제들이 있으면 끈기 있게 성경을 연구하면서 특히 선지자들과 바울 연구에서 해답을 찾았다. 그 외에도 교부시대의 어거스틴, 크리소스톰의 신학과 신앙을 특히 참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칼빈의 학문하는 방법은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선배인 마틴 루터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하나를 보면 그의 성경적 기초가 얼마나 튼튼하고,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은 신학적 지식 그리고 광범위한 자료를 섭렵했는지 알 수 있다.
칼빈의 주석은 늘 목회의 현장을 생각했다. 그리고 칼빈의 「성경 주석」은 당대의 목회자들에게 목회의 지침서인 동시에 현대 주경신학의 표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칼빈의 주석 또는 칼빈의 주해는 번쇄한 이론 전개나 낱말 풀 이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었다. 칼빈의 성경 주석은 항상 목회의 현장, 삶의 자리를 염두에 둔 해석이었다. 칼빈의 주석은 장황하고 불필요한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학문적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성경을 삶의 현장에 적용시키면서 본문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의 주석은 주해를 위한 주해라기보다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돕기 위한 강단용 주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칼빈의 그러한 점이 종교 개혁을 크게 넓게 확장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또한 칼빈의 「설교집」은 칼빈 신학을 이해하는 데 「기독교 강요」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칼빈은 말씀의 종이며, 연속 강해 설교의 모델이 되었다. 가령 칼빈은 욥기 한 권을 가지고 159번의 설교를 했으니 그의 설교의 깊이와 적용에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칼빈의 설교집은 라틴어뿐 아니라 영어로 번역되어 당시의 목회자들에게 목회의 지침서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설교집은 3, 4판을 거듭했다. 칼빈은 영국이나 스코틀랜드나 화란에 가본 일이 없었지만 그의 저술이 그곳에서 번역 출간되어 교회를 변화시키며 세상을 변화시켰으니 글의 역할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칼빈의 「서간집」은 또 어떨까? 칼빈은 문필가였기에 당시의 유럽의 왕들, 제후들 그리고 신학교 교수들, 목회자들 그리고 개혁의 동지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서 아주 확실하게 교회 개혁의 내용, 방법과 진리 체계를 호소했다. 또한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답신」 등 칼빈의 소논문집은 명쾌하고 주옥 같은 논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칼빈이 종교 개혁자로서 가장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는 신학자였고, 설교자였지만 동시에 그는 세련된 문필가였음을 빼놓을 수 없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하나님 중심의 신학자, 칼빈_15 |
칼빈과 성시화 운동_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