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목사로서 칼빈_28
요한 칼빈은 목사이다. 그는 전형적인 목사이다. 그런데 칼빈은 신학자 특히 조직신학자로서 너무나 강조된 나머지 그가 진실한 목회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흔히들 많은 분들이 설교할 때 ‘칼빈 선생’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칼빈이 언제 목사가 되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언제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는지는 기록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의 시각으로 칼빈을 보면서 어느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어느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느냐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모든 신학교는 가톨릭의 신부를 길러 내기 위한 수도원 중심의 신학교 뿐이었다. 루터는 가톨릭 신부 출신이고 수도원에서 신학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칼빈은 본래 인문주의학을 공부하고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당대의 고급 언어였던 라틴어의 대가였고,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으며 교부신학을 공부했으며 성경 연구에 집중했다. 그래서 27세의 나이로 불후의 명작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고 일약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에 우뚝 섰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신이 위대한 개혁 신학의 기초를 놓았으니 오늘의 잣대로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라는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더구나 칼빈이 어디서 안수를 받았느냐 누구의 손을 올렸느냐 하는 것은 후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체제와 규칙, 정치 제도가 정착된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목사 자격을 임명하는 것은 제네바 시의회였다. 제네바 시는 일찍이 파렐(W. Farel)의 종교 개혁의 지도로 프로테스탄트로 기울어져 있었고 칼빈이 종교 개혁이 가능하도록 터가 닦여져 있었다. 그러나 1536년에 칼빈은 목사로 임명받고 제네바 교회 곧 제네바 셍 비에레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의 목회 사역은 예배 인도, 설교, 교육, 성례 집행, 행정 등 그의 일생은 목사로서의 삶이었다.
제네바의 하나님의 교회, 칼빈 목사
1578년 영구에서 출판된 요한 칼빈의 요나서 강의와 설교집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제네바의 하나님의 교회 목회자, 신학 박사, 요한 칼빈 목사”로 소개되었다. 이로 보건대 당시 유럽에서는 칼빈이 신학자로서 또는 종교 개혁자뿐 아니라 목회자요, 목사로서 더 잘 알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2년간 목회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축출되어 스트라스부르크로 갔을 때 마틴 부쳐의 추천으로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청빙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더욱 성숙되어 갔다. 그리고 3년 후 제네바 교회에 다시 청빙을 받아 그의 임종 때까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로서 또는 목회자로서 사명을 다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도 그렇고 역사가들의 평도 그러하지만, 칼빈에게는 목사로서의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따뜻한 면모는 찾을 수 없고 엄숙하고 차디차고 냉혹하리만큼 반대편을 짓밟는 독재자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이유는 이렇다. 칼빈의 일생은 전투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모두가 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로마가톨릭 당국은 눈엣가시였고 그를 저주의 인물로 보았다. 그뿐 아니라 같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이른바 리버틴이라는 자유주의자들도 칼빈의 적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제네바 시의회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 칼빈에게는 저항 세력이었다. 이처럼 칼빈은 온통 적대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그래서 칼빈의 초상이 80여 개나 있지만 제네바에서 그린 것만이 유별나게 눈이 날카롭고 눈에 흰자가 많고 차디차고 전투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독일, 화란, 헝가리에서 그린 것은 전혀 다르다. 유순하고 자비로운 목자의 모습이 바로 칼빈의 모습이다.
칼빈은 전형적인 개혁주의 목회자
특별한 사건은 칼빈의 생존 시부터 칼빈을 괴롭히던 못된 인물이 있었다. 그는 1577년 본래는 개혁 교회 노선에 섰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한 제롬 볼섹(Jerome Bolsec)이란 인물이다. 그는 소위 칼빈 전기라는 책을 쓰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더러운 욕을 다 썼다. 그리고 그는 칼빈에게 저주에 저주를 퍼부었다. 후일 역사가나 가톨릭은 그것을 근거로 칼빈을 욕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칼빈의 그 수많은 편지와 설교를 살펴보면 실상 칼빈은 전형적인 목사요 설교자였다. 그는 심방을 귀히 여기고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목사였다. 그리고 모범적 강해 설교자였다. 칼빈은 참 목자상을 우리에게 남겼다. 칼빈은 전형적인 개혁주의 목사였다. 왜냐하면 천 년 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해석해서 증거하는 강해설교자였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미신적 미사 행위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개혁했다. 칼빈은 개혁주의 목사로서 교회의 개혁뿐 아니라 예배의 개혁자가 되었다. 칼빈은 목사로서의 따뜻한 마음으로 양들을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목사였다. 조직신학자로서의 칼빈 또는 성경 강해자로서의 칼빈 못지않게 목사로서 칼빈이 더 크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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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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