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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4-18 19: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W.C.C.의 사회구원적 기독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


* 논문의 출처. 발행기관: 개혁신학회, 간행물: 개혁논총 19권 0호, 발행 연도: 2011년, 페이지: 111-145(35pages)


3.1 하나님, 구세주,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나아가 그리스도는 더 분명하게 더 이상 어느 특정한 사람의 구세주가 아닌 모든 인류의 구세주로 선언되었다. 1996년 신앙과 직제 위원회 방콕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구주 되심은 보편속죄론에 기초하여 만인구원론적으로 해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돌아선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신 것이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창조 세계의 관계가 질적으로 새롭게 되어, 인간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웁살라(1968년)에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자는 구조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을 1996년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더 급진적 기독론을 고착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 현존하시면서 자신을 이 세상의 고통과 고난의 실재와 동일시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뜻한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정말 죽으셨고, 이 실질적인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능력 안에서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모든 것을 계속해서 확인해 내고 대면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1948년에 이미 1996년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사회구원적 기독론이 잔재하였다. 1948년 WCC헌장에 담긴 교리에서 우리는 박형룡의 비판과 같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수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실제로 의미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였다. 구주의 유일성, 대속적 속죄, 개인의 영생과 육체의 부활 및 멸망에 대해서는 1948년 이후로도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로잔언약 3항은 명료하게 잘 바로잡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신인으로 …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고 …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예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전파함은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말이 아니며 또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공한다고 보장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전하는 것은 오히려 죄인들이 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며 마음을 다한 회개와 신앙의 인격적인 결단으로 예수를 구세주와 주로 영접하도록 모든 사람을 초청하는 것이다.

WCC는 총회 출범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선언문은 너무 많기 때문에 여기서 근거 자료를 제한적으로만 제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왜 WCC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였는지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구원적 교회 연합과 봉사 사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입된 기독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특정한 부류에 한정되지 않는 온 세상 모든 곳, 모든 사람의 주인 되심을 의미한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 현재 성도들을 섭리하시는 주로서의 그리스도는 언급되지 않고 만유의 주, 에베소서 1장에 근거를 둔, 피조물 전체의 지배자로서의 주, 화해된 전 인류와 피조계의 주로서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낙관적 세계관과 만인구원론을 전제하는 구속론이 암시되어 있다. 물론 모든 땅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무질서로 얼룩진 세상을 구하는 일이 교회의 주 사역이 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나아가 세상이 구조 악으로 점철되어 있는 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는 것은 온 세상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사역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missio Dei 개념 도입과 정착은 시간문제였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해방 전략이 선교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 모든 사회구원적 교회 사역은,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를 위한 희생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되었다’는 논리 앞에 WCC에 가입된 교회는 쉽게 설득되었다. 전통적 속죄론이나 영적인 의미는 이제 사회경제적 단위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주라는 것은 또한 모든 세계의 문화의 주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나이로비에서(5차 WCC 총회)는 이를 잘 보여주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이시므로 어느 시대와 장소에서든지 각기 다른 문화 속에 자신을 알리셨다고 보고, 따라서 각각의 문화 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할 필요가 있고, 이는 곧 자연스럽게 타 종교와 무종교인들의 신앙을 인정하고 이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3.2  유사 기독론

WCC가 하나님, 구세주, 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언급하였다고 해도 성육신의 심오한 신비, 속죄론에 대한 전통적 이해 등에 관해서는 의도적으로 회피하였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수납한다는 정도에 그치고 죄의 심각성은 논외로 한 채, 은혜의 대상으로서만 인간, 화해된 인간만을 보고 기독론을 전개한 것이 이러한 의심을 받게 하였다. 이는 WCC의 기독론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고 해도, 이러한 소극적 기독론 기술은 아마도 사회 구원적 기독론의 논리적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평가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WCC가 계속 침묵을 지키다가 1967년에야 비로소 칼케돈 신조를 거부한 사실에서 우리는 WCC의 기독론이 진정성을 갖는지 회의적이다. 따라서 부정적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WCC는 ‘유사기독론’을 전개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혼란을 겪는다. 왜냐하면, 니케아 신조는 받아들이고 칼케돈 신조는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니케아 신조에서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신비한 요소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WCC는 니케아 신조가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하지 않을 신비한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조 자체가 갖는 특성을 고려하여, 이 신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표현한 호모우시오스는 교리적 충만성이 담겨있다고 적극 변호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67년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비하게 묘사한 칼케돈 신조는 수용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에큐메니칼 신조 수용과 관련한 WCC의 입장이 모순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WCC가 에큐메니칼 신조를 수용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칼케돈 신조는 거부하였는가? 우선, 좀 궁색한 변명으로 들리는 논리는, 칼케돈 기독론이 제국적 지배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그 진정성이 확인되지 않는 교리를 오늘날 현대에 수용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 칼케돈 신조 거부 이유는, “현대를 위한 칼케돈의 해석”이란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논할 때에 위로부터의 기독론보다는 아래와 ‘함께하는’ 기독론, 즉 “세상과 역사와 관련된 하나님이 인격적 실존”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것에서 암시되어있다. 역사적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논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후자의 이러한 유형의 기독론은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mann, 1846-1922)으로부터 시작한 그리스도 인격론 형식이고, 비록 스승 헤르만의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 바르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기독론 양식이어서 흥미롭다. 이러한 분석은 자료가 불충분하여 더 이상 논의 전개는 어려운 것이 유감이다. 하지만, 칼케돈 신조가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사회구원적 교회론을 위해 매우 실용적으로 기독론을 대하여서일 것이다. 기독론의 형이상학적, 사색적, 신비적 요소가 현대의 실존적, 실천적, 논리적 컨텍스트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여겨서이다. 그래서 가장 신비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형이상학적 그리스도의 인격을 선언적으로 표출시킨 칼케돈 기독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교회의 역사적 참여가 주요 목표이므로 고통과 아픔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같이 고난을 겪는 모습을 그리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첨예한 기독론 논쟁에 깊이 관여할 여유도, 관심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WCC는 사회구원적 사역의 신학적 근거를 기독론보다는 신론에서 즐겨 찾았다. 하나님의 주권이 기독론을 변방으로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이름만 기독론을 유지시킨 것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1983년 밴쿠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에 관한 논쟁을 한 후, 수정된 문서를 통해 기독론적 일부 술어만 언급하고 이어서 신론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그 증거이다. 창조주 하나님, 세상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에 초점이 모아졌던 것이다. 이어서, 바르 선언과 9차 총회(Porto Alegre, 2006)에서 ‘은총의 하나님이여 세상을 변혁시키소서’라는 주제로 ‘은혜의 하나님’이 주된 관심이 되었다. 부실한 기독론 혹은 유사 기독론을 넘어 신론적 축에 기대게 된 것은 기독론에 회의적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는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신학적 근거가 WCC의 사회구원적 사역, 그리고 그것의 중요한 일부가 된 종교의 다원성 논리 구축에 충분하다고 판단되어서일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타 종교 전통의 다양성으로 나타났음을 발견하였다고 자축하게 된 것이다. 신론 중심으로의 전환은 반성육신론자이면서 WCC의 적극적 참여자인 존 힉(John Hick)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창조주이시며 인류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특정한 사람만 구원할 수 없으며, 따라서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노골적으로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은선이 비판적으로 논의한 바와 같이, 이러한 존 힉의 신학은 기독론을 넘어선 것은 물론, 기독교 혹은 교회 중심으로부터 보편적 신개념 중심으로 전환되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WCC의 기독론 회피 움직임은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할 위험을 안고 있다. 기독론으로부터 신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WCC는 놓치고 있는 것이며, 그 결과 1976년에 어느 아프리카의 WCC 대표가 심지어 ‘추장 그리스도론’을 제안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권문상 목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W.C.C.의 사회구원적 기독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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