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인 새벽에
고향 떠나 온 지 오십 년, 누군들 고향이 그립지 않으며, 누군들 보고 싶지 않으랴. 상념의 무리가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하늘을 잃음이요,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살다가, 죽어서 조상이 묻힌 땅에 장사된 곳을 본디 고향이라 하지 않았던가. 고향을 생각하면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만족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았던 시절, 허기진 고통의 세월 속에서, 내게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는 창가에서 마주하는 하늘, 정직하고 성실하신 아버지의 삶이 화도 나고 답답하기만 했다. 오늘따라 고향에 묻히신 아버지 생각에 울컥울컥 목이 메어오고, 철딱서니 없었던 때가 되살아나 자책과 회한으로 가슴이 아려왔다.
고향, 내 고향 남쪽 바다, 나의 과거가 있는 곳,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 석양 녘 주홍빛 노을, 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모습은 까닭도 모르는 울먹임이었고, 내 영혼 깊숙이 들어앉은 핏빛 그리움이었다. 간간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뱃고동 소리며, 어선 주위를 맴돌며 끼룩끼루룩 갈매기 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내 고향 풍광이 떨리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뿐만 아니라 갈매기 울음소리에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동요 속의 섬 집 엄마가 되어 모랫길을 허위허위 달려오곤 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아버지 직장 따라 가버리고, 가없는 항해, 참으로 험난한 항해였다. 눈물과 그리움과 절망과 산채만 한 파도가 내 항로를 위협하고, 온몸은 기진맥진이 되기 일쑤였다. 세 살 먹은 남동생을 돌보며, 조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특혜가 주어지므로, 내 꿈을 포기해야 했다. 버겁고 힘든 삶이었지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어린 나이에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나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사춘기 소녀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고, 부모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조차도, 사무친 정 한 자락도 심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는 직장에 사표를 냈고, 나는 일찍 결혼했다.
결혼하고, 사람답게 살아 보리라 다짐하고, 자지러지는 고통도 묵묵히 끌어안자는 생각으로 생존에 전념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부모라는 존재가 내 안에 너무도 깊게 들어와 있음을 발견했다. 부모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컸다. 지금 와 회억해 보니 그리움이 머루처럼 익어갈수록 서러움도 함께 가슴을 채워왔다. 결국, 누구를 원망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고, 부질없음을 깨닫게 했다. 지악스럽게 달라붙는 고뇌의 짐을 부리지 못하고 끙끙거릴 때면, 교육자이셨던 아버지의 그 인자하신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숱한 세월 속에 덧난 가슴의 생채기를 어루만지며 울컥울컥, 후회의 강물 속으로 나를 침몰시켰다. 그러나 때가 있었다. 망망대해에서 뱃전을 이끌어 주는 항로, 그게 하나님께서 계시해서 여호와를 알게 하는 말씀운동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무식한 사람이 무식한 상태에서 열심만 내게 되면 열 번이면 열 번 속는 일이었다. 성경적 기독교가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충족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신, 살아 존재하시는 최고의 진리, 성경을 배우게 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 엄청난 믿음을 선물로 주셨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벅차올랐다. 내 재주로 하나님의 의도를 어떻게 깨닫겠는가. 여기에 질문이 있을 수 없고 입이 다물어졌다. 죄인 되게 해서 의인 되게 만드신 하나님, 말씀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해서 경외케 하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의미이고 참뜻임을 깨닫게 했다. 성령께서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감사하게 하며, 그를 찬양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제일 된 본분인 것을 알게 했다. 내 노력과 내 재주로는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불가항력적 은총 앞에서 믿음이 견고하게 성장하도록 양육 받고, 무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의 깨달음에서 시작됨을 알게 했다. 빛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마음 가운데 그 빛을 비추어줌으로, 흐트러진 마음, 혼탁한 마음이 정돈되어갔다. 오직 보혜사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철저한 성경교육에 집중하는 자세로 나아가게 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모님을 주셨고,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종이 되게 하려고, 임상의 세월이 필요했고, 역사의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알게 하므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죽이면 죽고, 살게 하면 살고, 나를 죄의 권세에다가 맡겨놓으면 천하없어도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을 알게 했다.
어느 시인은 고통스러운 삶도 소풍쯤으로 생각하고 즐기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삶은 소풍이기에 즐겁고, 천상으로 돌아가는 죽음 또한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영원한 가치는 하늘에 있지 않느냐고 했다. 예부터 죽음이란 돌아간다 했지 않는가. 세찬 비바람에 내 몸이 패이고, 거센 파도에 내 몸이 부서져도, 나는 하나님의 조각품인 것을, 얼굴에 찌그러진 주름살을 덧입히고 눈의 광채를 빼앗아 간다 해도, 내 생애는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게 경이이고 감동이 아닌가. 세속적 행복을 누린 자의 편에선 그 행복을 놓고 가야 하니 슬플 것이고, 하나님을 모른 자의 편에선 평생 불행하게만 살다 생을 마감하니 많이 슬플 것이다.
그러나 삶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닌가. 고통은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지만,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왜 살게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나의 굳은 심장에 생명의 피가 흐르게 하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하므로, 하나님 나라에 분명한 소망 가지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현재가 만족하면 과거를 후회하지 않게 되고 미래를 염려하지 않게 된다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 살면서 나를 인도해가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든든하고 두려움이 없고 걱정근심도 사라지게 되고, 이제 기죽을 일 없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확신, 창세전에 이미 예비하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알게 하신 하나님,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해도 ‘욥’의 생애만 하겠는가. 잘못하면 벌 받는다고 하는 인과응보의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 한 평안은 얻을 수 없다.
대부분의 나날을 나는 실내에서 머물게 된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의 삶이라 했다. 내 아픈 다리뼈가 바스러진다 해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장애가 될 수 없다. 모든 만사가 의미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내 인생 끝날까지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다스림 받게 되기를 바라면서, 형편없는 죄인이고, 엄청난 무거운 짐 지고 고통받고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나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사랑에 감사하며, 사도바울이 삼 년 반 동안 밤낮으로 성경을 가르쳤다는 말을 곱씹어 본다.
나의 영원한 처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하고, 살길을 열어주셨으니 이게 복 아닌가. 인생이야말로 이슬과 노을처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소풍은 어디까지나 잠시 다녀오는 것,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나 돌아가리라. 본디 고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