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꽃이 피었다. ‘나도 꽃이다’ 하고 여봐란듯이 하루가 다르게 꽃을 피운다. 이른 봄 미처 잔디가 푸르기도 전에 푸릇푸릇 잎이 올라오더니 현란한 햇살 속에 피어나는 풀꽃들, 단독주택에 살 바에는 잔디밭 정도는 딸린 집에 살고 싶었던 것이 소녀 적부터의 꿈이었는데, 막상 살다 보니 체력도 따라주지 않고 마당 일은 한도 끝도 없다.
그만그만한 키로 피어나는 풀꽃들, 클로버들은 질기고 치밀한 그물망을 만들고 잔디밭이 아니라 꽃밭이다. 고운 보라 빛깔, 노랗고 하얗게 무리지어 피어 있는 꽃들을 들여다보고 만져보지만 도무지 이름을 모르겠다. 이름 알아 무엇하랴. 화려한 생활을 향유하는 세태 속에서, 자그마한 풀꽃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여유를 찾으며 사색의 시간이 주어지는 게 사는 멋이 아닌가. 솔로몬의 영화로도 저들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지 못한다 하지 않았는가. 너무 예뻐서 잔디 살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심지도 않았는데 누구 뜻대로 번식하고 넓은 정원을 전부 점령하여 꽃을 피우는고.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하룻밤 새에도 꽃을 피우는 생명력이 한편으로는 경이롭고도 두렵다. 땅의 후박을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풀꽃, 아침부터 풀꽃의 살랑이는 모습에 취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교회가 멀어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강의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주보와 6월 행사유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운동 연합사경회 및 기독교 지도자협의회 총회, 그리고 발표회’
‘발표자’ : 00000 미정
‘주제’ : 00000 미정, 미정, 미정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폐회기도 란에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거 참...’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이름 아닌 이름 때문에 크게 놀랄 때도 더러 있었고 눈을 부릅뜨고 다시 확인하는 버릇도 생겼다. 빈칸에 누구나 일상다반사로 쓰는 단어이다 보니, 뜻을 이해하면 쉽게 이름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혹여 한자로 풀이하는 철학관을 찾아갔다면 되먹지 못한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남의 이름을 이따위로 지었느냐고 야단을 맞았을 것이 뻔하다. 어쨌든 철이 들어가면서 왜 이름에다 꼬리 미(尾)를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아버지께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 아버지는 그때 중학교 국어교사였다. 누구보다도 한문에 능통한 분이셨다. 그런데 내가 태어날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아서 휴직하셨다. 내가 태어나자 누군가 출생신고는 했지만 내 이름을 짓지 못하고 빈칸으로 두었다. 그런데 면사무소 직원이 그만 빈칸에 ‘미정’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적어 넣었던 것이 영영 내 이름이 될 줄이야. 영문도 모르고 내 나이에 이름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내 흉을 들춰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삶의 가치가 변해 갔다. 세상에서는 이름이 얼굴이라지만 신령한 의미로는 꼬리도 몸 된 그리스도의 한 지체이고 보면 그도 귀한 이름이요 선물이었다. 아직 미정이라도 내가 완성되기까지 써먹어야 할 이름, 절대로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지혜와 건강과 환경을 허락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하는 마음으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써 차가 집 앞에서 멈춰 섰다.
교회에서 돌아와 뜰 안으로 들어서니 꽃 잔치가 한창이었다. 주객이 전도되어 실로 야릇한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저들이 딛고 서 있는 영역을 애정으로 다독이는 삶의 멋조차 없어야 되겠는가.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꽃길을 걷는 낭만과 젊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야들야들한 잡초며 풀꽃이라도 구경하며 사는 게 누구의 은혜인가. 내가 주인인 양 내 멋대로의 행동 속에서 ‘여호와’ 그 이름을 운운한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이다. 저 풀꽃들은 스치는 바람을 탓하지 않고, 환경을 탓하지 않고, 역경에 처할지라도 강인하게 인내함으로 꽃 피우지 않는가. 저들의 거처가 우리 집 앞마당으로 허락된 것을 누가 아니라 하겠는가. 가장 낮은 곳, 가장 은밀한 곳도 마다하지 않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함께 더불어 하늘을 향해 합창하지 않는가. 언제 누구 손아귀에 뽑혀 말라 사라질지 모르지만 두려움 없이 저들만의 감동으로 활짝 웃고 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풀꽃 같은 인생 아닌 자 있었던가. 우두커니 서서 풀꽃을 바라보았다. 감정의 요소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 두꺼운 얼음장 밑을 흘러가는 강물 소리만이 차가운 겨울을 알 수 있듯이, 살았던 흔적,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추억까지도 얼마나 아름답고 값진 삶이었는가를 깨닫게 했다. 인정하고 감사하며 그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삶, 평생 잘 기억해 두어야 할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그분만이 영혼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한번 맺은 사랑은 결단코 다른 신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천명이라, 저 꽃들을 보라. 길섶에 풀꽃 하나라도 곱고 아름답게 입히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여호와’ 그 이름 기억하게 하려는 데는 좋고 나쁨이 어디 있겠는가. 먹고 사는 게 누구의 은총인가. 모든 것이 그의 뜻 아닌 것이 있던가. 외롭게 핀 들꽃이 있듯이 나에게도 어쩔 수 없는 고독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 얼굴이 그려진다. 그 이름 내 아버지, 아흔이 넘도록 사시면서 칠남매의 자식을 두었지만 어느 자식의 사랑을 받았던가. 불효에 대한 내 자신에의 심한 매질,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 되는가를 깨닫게 했고, 그래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예쁜 딸자식 이름도 제대로 지어주지 못했다는 그 말도 이제는 잊혀 간다. 그때 아버지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버지의 본심이 아니었으리라. 내 아버지의 마음은 순수함이 배어 있었고, 처세술이 능한 분이 아니셨다. 내 아버지는 그렇게 순박하면서도 모나지 않는 삶을 살다 가셨다. 내 호적이 빈칸으로 아직 미정이라 해도, 내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 태초에 이브의 치부를 가렸던 나뭇잎이 벗겨진 것도 아니고, 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내 이름은 아직 미정, 이름 모르는 한 송이 풀꽃, 어차피 유한한 목숨,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에서 ‘주’의 이름으로, 오직 그 감동으로 살아가고 싶다.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지혜의 영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