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방법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잡을 수 없는 게 행복이다. 흔히들 행복을 자기 마음대로 얻어지는 거로 생각하지만 큰 착각이다. 행복의 조건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근본 뿌리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안다는 것은 기본조건이다. 그래서 행복해지려면 하나님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면 행복해질 수가 없다.
“기독교 행복의 종교적 조건은 근본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신지식과 그에 수반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한다”(박용기 저, 기독교 행복론 p43)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행복한가. 그런데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는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종교적 조건을 갖추게 해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섭리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 에 따라서 생각은 완전히 어둠과 빛으로 갈라진다.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 모든 능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나는 아무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자기에 대한 주제 파악을 정확히 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면 능력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따라온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믿을 수는 없다.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이는 올바른 신앙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불행의 요소가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아무리 행복한 순간에 있다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자기를 조금만 무시해버리면 그 행복은 순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자기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만족이라는 게 없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알게 되면 허황된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구약성경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때는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할 때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할 무렵, 히스기야 왕이 등장하기 이전 무렵에 남쪽 유다도 다 망하게 되었다. 그 찬란했던 다윗 왕 시절, 그 호화찬란했던 솔로몬 왕 시절, 팔십여 년을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그 뒤로부터 계속 유다 백성은 타락하기 시작해서 급기야 호세아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알자,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를 몰라서 망했다는 외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하나님 모르면 결국은 불행하다. 유다 백성이 지금 불행하게 된 것도 하나님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막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지식을 가지는 만큼 자기 지식이 이루어지고, 자기 지식이 이루어지는 만큼 신앙은 자라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얼마나 진실하고, 사랑이 크고, 주권자이시고 전능한 분이심을 아는 데서 신앙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무능하고 비천한 존재인가를 자꾸 깨닫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지 않는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잠시 기분 따라 의지하다가 다시 불신앙으로 돌아가는, 자갈밭에 떨어진 신앙과 같다.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은 분명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능력 있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참 신앙이다. 하나님 알게 되면 누가 믿으라고 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규례와 명령(율법)을 명하였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신명기 6: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는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게, 항상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행복하니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사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다.
알면 믿게 되어있다. 자칫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한다면 완전히 언어폭력이다. 막상 내가 모르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는가. 모르는 전화번호는 전화가 와도 안 받게 되는 세상인데,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 다른 방법으로는 행복해지는 방법이 절대 없다. 천하 없는 방법을 다 채택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솔로몬이 실컷 해보고 이야기 한 것이다. 복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근본 뿌리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막연한 신앙은 죽은 나무에서 과일을 따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풀에 꽃과 같이 비틀어지는 풀잎처럼 허무하기 일쑤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지식의 농도만큼 행복의 농도를 가중시킨다. 그리고 신지식과 신앙을 따로따로 이해하는 데서는 생명력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이 그 많은 인류 중에 선택해서 뽑아놓은 사랑하는 백성이지만, 애굽에서의 사백 년 동안 모진 노예 생활, 광야의 사십 년 생활, 가나안땅 들어가서도 모질게 고통을 겪으면서 시련을 당하도록 하시는 하나님, 그 섭리를 보면 인생살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나에 대한 지식이 생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 하나님이 망하게 하면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흥하게 해야 흥하는 자. 나를 하나님이 붙들어주어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버려두면 나는 온통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 이런 구체적인 하나님을 아는 것이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수반하는 결과적인 조건이다.
깊은 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진짜 그렇다. 하나님을 아는 깊은 마음은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요지부동(搖之不動),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신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하게 하는 일을 기쁨으로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