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
이른 새벽, 그이의 신음 소리에 눈을 떴다. 밤새워 뒤척이며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다가 잠시 잠이 들었나 했더니,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자는 척 했나 보다. 내가 눈을 뜨자 그이는 살며시 내 손을 잡으며, 무슨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귀를 바짝 대고 들어보니 ‘진정으로 사랑했소’ 한다. 그 짧은 한마디, 나로선 처음 듣는 말이었고 마지막 말이 되었다.
한때는 그이를 향한 미워하는 마음이 싹트면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믿었던 돌에 발부리가 채어, 내 아픈 발부리만 움켜잡고 꺾인 자존심이 분하여 원망과 증오심에 철딱서니 없이 행했던 그때를 생각하니 자책과 회한으로 목이 메어온다. 대저 그이는 행복했을까? 진정 사랑했을까? 아니면 잠꼬대를 했던 것일까? 사소한 일에도 화를 버럭 내기 일쑤고, 온종일 있어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던 그이였기에 나로선 믿어지지 않고 엄청난 자극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이는 세상을 더 좋아했고, 신지식에 목말라 갈증을 호소해본 적도 없었다. 물론 타락된 자들의 삶의 집단, 그 안에 교회가 다 섞어져 살고 있지만, 교회는 구속받은 성도들의 삶의 터전이라 말할 수 있고, 결국 행복의 결과는 교회를 이루게 한다. 그렇다면 그이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이라는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이로 하여금 가족을 위해 한평생 성실한 봉사의 삶을 살게 했단 말인가. 사실 인간에게는 독립적인 행위나 어떤 조건이 전혀 없고,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전부 연결고리가 돼 있기에 다시금 그때 일을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고, 삶을 반추하는 수필을 쓰게 된다.
그이는 암 선고를 받고 병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많은 후회를 했다. 한마디로 진실로 가족을 사랑하며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미 몸에 배어버린 생활습관이 쉽게 고쳐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죽음의 때가 가까이 옴을 느끼게 했다. 내면과 외면의 대변혁이 일어났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그이는 날마다 내 손을 붙들고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를 하게 하고, 찬송만 부르게 했다. 심지어 세상 친구들이 문병 오는 것을 싫어하고 오로지 교회 성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멀고도 험난한 인생길을 걷는 동안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하여 왔던 피곤이 풀리는지 실로 평안해 보였다. 그이는 인생의 헛됨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탐구에 소신 있게 하나님의 빛깔, 하나님 구도의 그림을 그려나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주는 대로, 불평불만이 줄어들면서 행복해 보였다. 하루를 살아내기가 조심스럽고, 다가올 날들이 불안할 만도 한데 좋은 날을 바라며 살아가는 그의 긍정적인 삶의 자세에서 나는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그이의 간절한 소망은 천국이었다. 자신을 돋보이려 발돋움하는 과대포장도,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한 위장술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를 더듬더듬 외우는 모습이 들녘에 피어나는 낯익은 풀꽃같이 정겹기만 했다. 그이는 무명베처럼 따스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아들, 딸, 며느리, 그리고 어린 손자들까지 일일이 포옹하며 하나님 잘 섬기다가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비록 이 땅에서의 교회 생활의 맛은 못 느꼈지만, 교회의 가치에 대한 남다른 의미를 지녔을 터, 그 무겁고 두꺼운 가면이 벗겨지는 데 육십오 년의 세월이 걸렸다. 여호와께서는 임종을 앞두고 기독교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목사, 장로, 권사, 병원 직원들, 그리고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 그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세례를 받게 하고, 날마다 불렀던 찬송,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182장(구주의 십자가 보혈로)을 모두 합창을 했다. 그이는 그렇게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어, 영원하신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때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잘 먹고 잘살고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리를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진정한 사랑이 싹트게 하고 성실한 봉사의 삶을 살게 했다. 갈등과 체념과 좌절과 절망의 소용돌이를 지나 영원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된 그는, 나의 추억의 꽃밭에 행복한 모습으로 여울져 있다. 나의 숱한 세월 속에 덧난 생채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루만지며, 오직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고 섬기며 살게 하는 섭리만 바랄 뿐이다. 사랑이 싹트고 성실한 봉사가 있는 곳이 정말 아름다운 교회이고 복된 가정이 아니겠는가. 마음속에서 행복한 자가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가 있을 리 없고, 행복의 결과인 진정한 사랑, 그 사랑의 기초가 없이는 아무것도 세울 수가 없다. 기초가 없이는 집을 세우지 못한 것처럼, 진정한 사랑이 없이는 진정한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미움과 증오가 싹트면 부부간에도 윤리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고, 윤리의 기초가 흔들리면 미완성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을 그때는 나로 왜 깨닫지 못하게 했을까. 그래서 혼란을 일으키고, 서로 갈등이 생기게 하고, 미워하게 되고, 다투게 되는 결과를 왜 가져오게 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한번 언약하시면 그 언약을 어기는 법이 없고, 인자함이 풍성하시다고 했다. 아주 버리지 아니하고 택한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을 주어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 존재하심과 그의 전능성, 신실성, 주권성, 영원성, 자비성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고, 여호와만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일어난 일마다 여호와 계시이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을 항상 겸해서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는 것도 은혜요, 그게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근본이 아닌가.
고린도전서 13장 1~7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사랑의 중요성에 대하여, 사랑 없는 모든 행위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 자신의 행복 없이, 내 가정의 행복 없이,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기독교적인 성도의 진정한 사랑은 행복의 내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곧 사랑의 결과가 행복이 아니라 행복의 결과가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랑은 성도 윤리의 기초가 되며 율법의 완성이 된다,’(박용기 저, 기독교 행복론, p.55)라고 밝혀주고 있다.
행복은 결코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행복의 결과로 주신 선물, 그 진실한 사랑,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당신을 사랑 했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