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스스로가 작정하신 뜻에 따라
여호와께서 엘리의 아들들을 죽이려고 타락하게 하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며 잘 자라게 한다. 그런데 새벽 미명, 그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전 안에 누워 있을 때에, 세 번이나 여호와께서 거듭 불렀는데, 제사장 엘리가 부르는 줄 알고 달려갔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서 여호와의 음성을 알아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사무엘의 의도와는 전연 무관하게 여호와의 절대적인 주권적 섭리로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는데, 여호와께서 네 번째 임하셔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이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의 방법을 비롯하여 그 이유와 그 결과를 예고하여 주신 것이다.(구약성경 사무엘상 2장 30~36절에 기록된 말씀) 이는 여호와께서 제사장 엘리에게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집을 멸하고 충실한 제사장으로 세우신다고 예고로 언약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시려는 섭리이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두렵고 엘리의 집 저주를 예고하는 말이라 그는 숨기고 싶었으나 제사장 엘리의 위협적인 요청을 거역할 수 없어서 세세히 털어놓고 말았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 그 시대의 상황은, 백성들은 자기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고, 당시 제사장 엘리는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는 형편이라 귀로 소문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들들의 범죄 행위를 단속하지 못하고 방관할 뿐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 작정해 놓고, 사무엘을 불러 예언하게 하신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에 그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호와 스스로가 세운 참 선지자로서 그가 예언한 대로 엘리 제사장 가문을 망하게 한다. 여호와께서는 이럴 때 쓰려고 블레셋을 이스라엘 곁에 놔두고 쳐들어오게 한 것이다. 벌써 대적이 쳐들어온다는 것은 망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한 후에, 언약궤를 백성들 가운데로 옮겨오면 여호와께서 원수들 손에서 구원해줄 거라고 잘못된 생각을 한 것이다. 언약궤 자체가 신통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전쟁에서 패하게 한 것은 언약궤가 없어서가 아니라, 엘리 가문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그렇게 제사 드리는 것을 소홀히 할 바에야 언약궤를 블레셋으로 빼앗아가게 한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제사장 엘리가 잘했으면 망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인간의 의지 여하에 따라서 대응하는 하나님밖에 안 된다. 내가 잘하면 잘되고 잘못하면 망하게 하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면 완전히 인본주의 사상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뜻은 인간의 방법에 의해 취소되거나 변동되지 않는다. 이미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해 예고한 말씀대로 엘리 가문은 망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여호와 경외할 마음을 주지 않았고, 아비마저도 자식들에 대해서 교훈할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해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여호와께서 망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사실 우리의 언약궤는 성경 말씀이다. ‘여호와 계시’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일관성 있는 논리체계를 따라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이해하기에 편리하도록 의미 분석되어 있는 성경신학이야말로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귀한 보배이다. 천둥번개가 치든, 지진이 일어나든 관계없이 오직 말씀만 잊지 않게 되기를 나 역시 바라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여호와께서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감개무량하고,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여호와께서는 거듭나고 중생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하고, 후대들로 열심히 공부하게 하는 것은 대를 이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일이란 진리(성경신학)가 변질 없이 전승되고 전파되게 하는 것,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생명이요, 여호와 하나님 살아계심의 확증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언약궤는 제사장 엘리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 언약궤도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기고, 아들들도 죽임을 당했으니 제사장 엘리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 충격으로 그는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에 목이 부러져 죽고, 엘리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엘리 가문에 혈통을 이어갈 유복자, 어린 이가봇만 남겨놓고 죽은 것이다. 여호와께서 엘리에게 그의 집에 노인이 없게 하신다고 예고한 저주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한 것이다(삼상 2:31). 이 내용만 보면 꺼져가는 등불이요, 꺾어진 갈대로 소망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언약궤는 블레셋 저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 못 된다.
여호와께서 솔로몬 때 성전을 세워서 여호와 경외하며 살도록 다윗왕국을 준비하고 있는데 왜 언약궤가 돌아오지 않겠는가.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오게 하는 것은, 백성들로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고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인간의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도덕적 방법으로 각자 입맛대로 성경을 해석하므로,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창세전 작정한 뜻은 묵살되고, 자기주장으로 설득시키고, 거짓 이론으로 가르치는 벌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등장시키므로 엘리 가문이 망하게 하는 것처럼, 망할 때는 새순이 나오게 된다. 비유가 아니라 타락한 엘리 아들들은 죽었지만, 성경에 근거한 성경신학의 자녀들은 자꾸 태어나게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자꾸 명상하게 된다. 언약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제사장 가문이 망했어도 ‘의미 분석 성경개론’(박용기 저)의 논리구조를 따라 상위주제로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 나라,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오면서, 승리를 눈으로 보는 것 같다. 전에는 사무엘이 소명을 받고, 엘리 가문이 패망하는 것이 내 인생에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걸 알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지막 사사를 등장시키는 그 의미는, 다윗왕국을 창건하셔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세 가지 언약(자손, 땅, 통치) 가운데 통치언약이 성취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통치언약은 왜 이루어주시는가? 이는 섭리를 통한 언약을 통해 전능자 하나님이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고, 백성들로 살아 존재하신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결국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작은 순을 준비해 놓고, 묵은 고목나무는 쓰러뜨리는 섭리, 다윗왕국을 준비하신 여호와께서, 언약대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보내셔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시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살아나가고 있는 현실 역사도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치밀하게 이루어져 가게 하신다. 여호와 스스로가 작정하신 뜻에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