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라이프

 
작성일 : 20-10-21 13:5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장 목사님께


목사님!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1953년도 부활절 때였으니까, 반백 년 세월이 흘렀네요. 목사님은 저의 고향교회 당회장이셨어요. 제가 누구인지 궁금하시죠? 가난한 시골교회라 담임목사님을 모시지 못하고 신학공부도 하지 못한 영수님이 주일마다 이른바 설교를 하셨잖아요, 바로 그분의 넷째 아들이랍니다. ‘어! 웬일이냐?’고요. 깊은 사연이 있어서죠. 언젠가는 목사님을 만나 뵈면 솔직하게 털어놓고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거든요. 왜 그랬는지 궁금하시죠.

그해 부활절 주일이 지난 그다음 주일로 기억이 난답니다. 목사님이 이른바 성례식을 집례하려고 토요일에 고향교회로 오셨어요. 제가 유아세례만 받은 터라 입교문답을 해야 했거든요. 성찬에 참여하면 떡도 먹고 포도주도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도 했으니까요. 입교문답은 목사님의 칭찬과 함께 무사히 통과되어 매우 기뻤답니다. 주일 아침에 성찬 상에는 어머니께서 손수 만드신 떡과 아버지께서 뒤뜰에 열린 석류로 빚어 놓은 붉은 즙이 하얀 덮개로 덮여있었어요.

급기야 시간이 되어 목사님이 까만 ‘가운’을 입고, 손에는 하얀 장갑을 끼고 등단하셨거든요. 먼저 몇 분에게 세례를 베풀고 입교인 선포도 하셨어요. 이어서 떡 한쪽을 손에 들고 ‘이것은 예수님의 살을 기념하는 떡입니다. 누구든지 양심에 가책이 되거나 범죄 한 사실이 있으면 받아먹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살을 범하는 죄가 되는 겁니다.’라고 하셨어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인가! 그럼 나는 먹어서는 안 되잖은가! 갑자기 친구에게 욕을 했던 일, 부모님 몰래 고물을 주고 엿을 사 먹었던 일, 친구들과 주인 없는 밭에서 참외를 따 먹었던 일 등이 생각나는 거였어요. 이런 일은 모두 죄가 된다고 전에 전도사님이 가르쳐 주셨거든요.

목사님은 떡 조각이 담긴 접시를 들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교인들 앞으로 일일이 다가가서 한 조각씩 나누어 주시더라고요. 분병이나 분잔을 도와줄 장로님이 아직 안 계셨기 때문이죠. 저는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곁눈으로 주변만 살펴보고 있었어요. 모두 떡을 받아 입에 넣고 조용히 기도를 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내 앞으로 다가오시기에 너무 두려워서 얼른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죠. 목사님은 내 앞에서 머뭇거리시다가 그냥 지나가시더라고요. ‘너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따져 묻지 않으신 것만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으니까요. 혹시 제가 어리니까 그냥 지나치셨는지도 모르죠. 그때는 목사님이 정말 고맙기까지 했답니다.

성찬식이 끝난 후, 아버지께서 남은 떡과 석류즙을 들고 담장 밑으로 가셔서 땅을 파고 묻으시더라고요. 목사님이 땅에 묻어야 한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아무나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거였어요. 아쉬운 마음에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답니다. 땅에 묻은 떡을 지렁이나 개미들이 먹을 것인데, 왜 나는 먹으면 안 되는 것일까? 맞아!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 왜 나만 죄를 지었을까? 다른 교인들은 죄가 없어 모두 떡과 석류즙을 받아먹는데! 먹는 분들은 정말 죄가 하나도 없을까? 생각이 깊어지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목사님이 정말 미워지기까지 했으니까요. 내 죄 때문인 줄 알면서도…. 생각해보니 떡과 석류즙을 먹지 못한 것보다,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갈 것이 더 두렵기까지 했으니까요.
훗날 신학을 하며 성경을 연구하면서 모든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답니다. 알고 보니 신학적으로 성찬에 대해 주장하는 바가 많이 다르더군요. 구교에서는 사제가 기도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거예요. 어떤 개혁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요. 또 다른 개혁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뿐이라고 했더군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을 했죠. 그 결과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어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도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 참예시켜 떡을 먹도록 하셨더라고요. ‘가운’이나 하얀 장갑을 끼지도 않으시고요. 고린도교회는 유월절에 성찬식을 집례한 것이 아니라, 성도가 모일 때마다 교제를 위한 식사를 한 것이고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책망했더군요. 이는 교회 내에 분당이 있어서이고, 각각 식사를 하다 보니 먼저 먹는 자는 배부르고 나중 먹는 자는 시장하기 때문이었죠. 집례자도 없고 양심에 가책되거나 죄를 범한 자는 먹지 말라는 내용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답니다.

목사님! 저는 이른바 성찬식 때 떡과 석류즙을 받아먹지 못한 것이나, 남은 떡과 석류즙을 담장 밑에 묻어버린 것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요. 그리고 죄 때문에 고민하며 지옥의 두려움에서 시달린 세월이 너무 억울했답니다. 모두가 목사님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잖아요. 목사님을 얼마나 증오하며 미워했는데요. 성경에는 어느 사도들이나 집사들이 성찬식을 집례한 사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정말 분하고 억울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후회하거나 목사님을 미워하지 않는답니다. 왜냐고요? 목사님도 선배들에게 잘못 배웠기 때문이라고 이해를 했거든요. 그뿐 아니라 죄에 대한 두려움과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깨닫게 된 기쁨이 형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바꾸어 생각하면 목사님이 참 고마운 분으로 여길 수도 있잖아요.

세례도 목사님은 물로 주었으나,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주신다고 하셨더군요. 불로 옛사람을 죽이고, 성령으로 새사람이 거듭나게 하신다는 의미였어요. 예수님과 사도들 어느 누구도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이 성경에 별로 없더라고요. 빌립이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길가 물에서 세례를 베풀었고요. 바울은 몇 명 외에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했더군요. 물세례 의식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목사님도 견해를 달리하는 말씀이 왜 없겠어요. 설령 아무리 다른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성경이 절대 표준이므로 어쩔 수 없잖아요. 제가 너무 건방지고 버릇이 없나요. 죄 때문에 너무 고민했던 과거가 억울해서 투정을 했어요. 누구나 성경을 모르면 전통을 따를 수밖에 없거든요. 목사님께 실례가 되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부디 안녕히 계세요.
2020년, 미숙했던 입교인 드림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둘째 형님께
김 선생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