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님께
교수님!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저는 이른바 명문 대학 신학연구원 77회 졸업생이에요. 강의 시간에는 교탁 오른편 제일 앞자리에 앉아 수강했잖아요. 교수님의 강의는 학생들이 좋아했거든요. 어느 시간보다 수강생이 많았지요.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총장에 취임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지금은 미국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는 소식도 들은 바 있어요. 갑자기 웬일인가! 싶으시겠죠. 교수님은 역사신학을 전공하시고 전문 신학자로서, 교수로서, 총장으로서 다방면으로 한국 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졸업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재학 시절에 교수님에게 여쭤보지 못한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았지요. 당시에는 교수님께 저 자신의 무식이 드러날 염려가 앞섰거든요.
1974년 3월, 신학연구원에 입학했지요. 처음으로 등교를 했는데, 마침 ‘오리엔테이션’ 시간이었어요. 모두 낯선 학우들 사이에서 기대가 부풀었어요. 학교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섭섭할 정도의 유능한 교수님이 강의하신다는 거였어요. 시간이 되자 강의실로 들어오신 분이 바로 교수님이셨지요. ‘핸섬’하시고 저에 비하면 키도 크시고 아주 멋진 모습으로 강의를 이끌어가셨어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기대가 매우 컸기 때문이겠죠. 제가 신학연구원의 문을 두드린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어요. 학교 본관 ‘로비’에 들어서자 앞면 높은 벽에 ‘칼빈’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을 보았어요. 드디어 ‘예정론’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요. 어려서부터 장로교에서 신앙지도를 받으며 ‘예정론과 우연론’에 대한 많은 갈등을 겪었거든요.
만면에 미소를 띠신 교수님의 강의는 드디어 시작되었지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앞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경청했어요. 장로교 교리의 특징에 대해 언급하시는 중이었거든요. ‘칼빈’은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았다면, ‘웨슬레’는 인간 편에서 바라보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후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도로 더 이상의 설명이 없으셨어요. 기대는 순간 무너지고 말았답니다. 좋게 말하면 ‘칼빈’도 옳고, ‘웨슬레’도 옳다는 뜻이었어요. 달리 말하면, 유교의 중용사상(中庸思想)을 두둔하는 의도가 있으신 듯했고요. 교수님이 가까이 계시면 직접 찾아뵙고 열띤 토론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될 수 없잖아요. 영존하신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예정 섭리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용납되지 않거든요. 어떻게 하나님의 절대주권 영역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용납될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유교의 중용사상과 같은 인간의 철학적 관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잖아요. 하기야 어느 교수님은 ‘예정론’을 너무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잘못하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매우 답답했답니다.
교수님은 교회사를 가르치셨잖아요. 중세교회사 시간에는 천주교의 교황을 성토하며 개혁자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셨거든요.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틀림없이 정반대의 견해를 주장하겠지요.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성경고등학교 시절에 들었던 내용을 상기하는 것에 불과했어요. 적어도 신학연구원 차원에서는 중세역사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는 선에서 연구되어야 하잖아요. 역사적 사건의 연대나 암기하고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나 기억하며 사건의 줄거리나 습득한다면 초등학문의 역사 공부나 다름이 없지 않나요? 교수님! 죄송하지만 참으로 한심했어요. 신학연구원의 역사신학 차원에서는 교회사만이 아니라, 한국사나 동서양을 비롯한 세계사를 신학적인 시각으로 살펴 연구함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분별할 수 있는 고도의 신학적 연구작업으로 보아야 하잖아요.
교수님! 계속된 교수님의 강의에 실망한 나머지 강의 시간에 들어가기 싫은 적이 참 많았거든요. 치졸하게 출석 ‘체크’하기 위해 들어가곤 했어요. 이렇게 솔직히 털어놓으면 교수님에 대한 모독적인 행위로 오해받을 염려가 많겠죠. 조용히 입 다물고 살다가 가슴 깊이 간직한 채 눈을 감으려고 했지요. 이 공개서한을 읽는 독자들도 역시 오해하실 분들이 많으리라는 것을 왜 모르겠어요? 대 학자를 모독한다고 화를 내시는 분도 계시겠죠.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신학은 발전하지 못하고 답습만 계속될 수밖에 없거든요. 현대인의 인지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잖아요. 우주여행 시대가 도래한 과학 전성시대에 손때 묻은 교재로는 진리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거든요. 신학이 성경으로 명쾌하게 정립되어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고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특별계시인 진리의 말씀이고, 그 외의 일반 역사 섭리는 하나님의 일반계시인 진리의 말씀이라 할 수 있잖아요. 일반계시가 특별계시의 조명이 없으면 인간의 업적이나 위대함이 보일 뿐이고요. 특별계시의 조명을 받아야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이 보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나 만사가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선포한다고 구약시대 시인들이 노래했잖아요. 교수님! 맞죠? 정말 맞잖아요! 문제는 먼저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아 알지 못하면 절대 불가능함을 알 수 있지요. 교수님이 앞서 예정론에 관한 문제나 교회사에 관한 문제도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아 알면 너무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들이거든요. 신학자들의 병폐는 성경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학자들의 학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데 있잖아요. 이는 성경을 깊이 깨닫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요?
제가 신학대학원 시절 졸업논문으로 ‘기독교 예정론’을 썼거든요. 논문의 논거를 학자들의 학설보다 성경 자체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 논증을 했지요. 논문 지도교수가 ‘엑셀런트(탁월함)’라고 평가하시고, ‘아카데믹(학구적)’하지 못하다고 토를 다셨더라고요. 역시 학자다운 평가라고 생각했지요. 반면 성경이 학자의 학설보다 못하다는 견해라는 느낌도 받았어요. 교수님! 거침없이 쓰다 보니 혹시 무례함이 있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되네요. 원래 토론은 좀 거친 데가 있잖아요. 이해하시고 부디 주안에서 즐겁고 평안한 여생을 보내시기를 기도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2021년, 실망한 제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