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대하여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나 역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내가 행복했다고 느낀 기억들은 행복한 척 억지일 때가 많았다. 알고 보니 행복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었다.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이 믿어질 때 역시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행복이란 복을 누리는 상태, 복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아담에게 주신 복으로부터 출발해서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을 성도가 이 땅 위에서 현재 누리는 상태를 바로 행복이라 했다. 행복론에 대한 강론을 듣고 나서 복과 행복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신학을 만나게 해 주셔서 흐트러진 사고 체계를 하나하나 정리해 갈 수 있게 해 주시고 갈등을 멈추게 하시고 방황도 멈추게 하시고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데 게으르지 않게 해 주시므로, 그 지식에 의하여 나를 쳐 복종케 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발견할 만큼 신앙의 깊이를 더해가게 함은 물론이고, 염려와 걱정 근심이 사라져가게 되고 정말 마음의 평강이 이루어지게 되며 만족한 가운데 감사하게 하시므로 오늘이 있게 하셨다. 이제는 나만 행복할 것이 아니라 내 이웃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게 되고 참으로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있게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바울 사도처럼 다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오늘도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던 나에게, 삶의 결을 쓰다듬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주는 성경신학이야말로 무궁무진한 보물창고라는 생각이 들고, 믿음과 행복은 불가분의 함수관계로 여겨졌다. 그래서 밤낮으로 강론 말씀을 듣고 기록했다. 30여 년 전, 그때의 기억이 항상 녹슬지 않는 구릿빛으로 남아있다. 그러다가 한동안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내 계획대로 살아보려고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두려움 없이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뿌리가 없는 행복한 꽃은 금세 시들고 마는, 그때의 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천한 존재였음을 말해 주듯, 누렇게 바랜 노트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찬바람이 분다. 내 가슴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분다. 내 마음이 왜 이토록 차가울까? 겁이 난다. 앞에는 심심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TV가 있다. 그런데도 왜 이토록 허전할까? 견딜 수가 없다.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고 싶다. 전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여러 번, 전화할 곳이 없다. 나 혼자 차라도 한잔할까? 그만두자. 어쩐지 청승맞다. 차 한 잔이라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주거니 받거니 해야 운치도 있고 맛이 난다.
찬바람이 분다. 내 마음이 차다. 뭣 때문에 내 마음이 이토록 썰렁할까?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밥이라도 한술 떠야겠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차 한 잔 나눌 벗이 없다니 내 성격 탓인가? 내 좁은 마음 탓인가? 열심히 애타게 때로는 간절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모두가 자기의 고독을 달래려는 방편이 아닐까 싶다. 정말 사람이 그립다. 내 마음 밑바닥까지 털어놓고 무슨 이야기든지 지껄일 수 있는 우정이 그립다. 조금 잘못된 말이면 어떠랴? 큰 웃음 한번 웃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런 친구가 그립다. 내 핏줄 내 자식들을 곁에 두고도 천 리 길을 떠나 친구를 만나는 의미를 알 것 같다. 사람은 어떠한 테두리 안에서 산다. 만일 그것을 벗어났을 때 가차없는 비판을 받는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사나운 속박인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고통이요 고독이다. 진정한 행복을 알 수 없다. 정말 살아가기 무섭다. 세상이 시끄럽다. 위선의 탈이 역겹다.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다. 따뜻한 인정, 따뜻한 마음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정말 무섭다. 방송에서 볼멘 목소리가 무섭고, 튀어나온 눈알이 무섭고, 거친 말투가 무섭다. 거리에 나가보면 얼굴 거죽으로 웃는 가짜 웃음들, 그래서 더욱 무섭다.
찬바람이 분다. 이렇게 마음이 차가우면 나는 글을 쓴다. 그 순간만은 마음이 훈훈해지고 아늑해진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들어서 행복하고 쓰는 것도 즐겁다. 삶의 반복에 세월의 무상함에 기분 좋은 일에도 슬픔에 젖게 될 때도 글을 쓰게 된다. 어제 보았던 그 산, 그 건물, 그 골목길, 그 모습들. 그래서 가끔 어디론가 떠나볼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가 다시 말씀의 세계로 향한다. 고달픈 마음 달래며 글을 쓰게 하므로 나는 글을 쓴다. 내면에 어떤 것들이 할퀴고 지나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더 놀라운 것은 내 속으로 낳은 자녀들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독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된다. 나의 목소리가 허공에 떠돌지 않고 언젠가는 메아리 되어 들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쓰게 된다. 세상은 자기의 주장이 강하고 자기 목소리가 높다. 어떤 사람은 오기로 그리고 나이로 한 몫을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아집에 얽매이고, 이렇듯 세상은 멀쩡한 정신으로 살기 힘들다. 그래서 세상에서 흉내내지 못할 말을, 올곧게 생명의 말씀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그래서 또 말씀에 귀 기울인다. 새가 날고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내 고향 같은 삶을 그리워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넉넉지 못하고 초라한,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글을 쓰게 된다. 목이 타면 생명수를 마셔가며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움츠러들어 있는 것을 펴고, 구부러져 있는 마음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바로 잡아가려는 것이다. 이 길만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아무튼, 감회가 새롭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키워가게 하려면 순풍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모름지기 성도라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여겨진다. 죽은 나무에서 과일을 따겠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 없으면 말라비틀어진 풀잎처럼 인생이 허무할 것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언제나 불행의 요소가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다. 행복을 얻는 데도 순서가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내적으로는 가치관의 변화가 오고. 외적으로는 행동의 변화를 일으킨다. 행복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뜻대로 하시는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은 무거운 짐만 지우게 된다. 내 가정의 행복 없이 남을 위해 사느냐는 것은 꿈 속에서 헤매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 행복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금도 살아 존재하심과 그의 속성을 아는 지식에 의하여 신앙으로 이루어지기에, 몇 번이고 반복해도 좋은 말이다. 그 목적은 나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은 두뇌에서 판단된다. 행복해야 한다.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이 믿어지는 사람은 반드시 행복해야 된다. 천국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루어져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