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있어야
성경은 일관된 논리와 근거를 모두 확보하고 있어서 진리임이 틀림없다. 기독교는 성경만 바르게 배우게 되면 문제 되는 것이 없고,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참 지혜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내면을 표현하는 일이고, 결국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자랑하게 된다. 그래서 머리로부터 주어지는 정보가 깨달아지는 만큼 자유로워지고, 억압을 당할 때는 감정이 날카로워진다. 그렇게 솔직한 표현과 자유로운 논전이 없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없고, 읽는 사람도 재미가 적을 것이다.
나는 요즘 세상 정치에 대한 뉴스를 보면 끔찍하다 못해 역겹다. 그런데 잠시 동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도 이쪽저쪽으로 나누어져서, 불미스러운 사태가 일어났다. 몇 주 전, 권징절차는 알 수 없으나, 진리를 위해서 40여 년을 봉사해 오시고, 지금도 수고하고 계시는 장로님 두 분과 권사님 한 분을 교회 운영위에서 면직 결정했다는 광고를 주보에서 확인했다. 온 성도들이 한뜻으로 결정해서 시행해 왔던 기독교지도자협의회가, 반교회 단체라는 이유였으나, 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어쨌든 교회가 세워져 가는 데 있어서 합력해야 할 지도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이상히 여겨졌고,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 보인 것 같았다.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거짓 선생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상하다. 교회에서 일어난 소란이, ‘성경을 배워온 결과가 이렇다’라고 하는 사회자 장로님 말에, 나는 머리가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을 듣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소위 예배드리는 시간에 목사님께서 종교개혁의 역사적 개관에 대해 열강을 했다. 성경 권위는 무시되고, 타락된 인간 이성을 신적 권위에 두는 암흑기가 계속되던 중, 신학자인 루터의 깨달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타락성을 개혁한 개신교가 등장하기까지를, 그런데 수많은 순교자들과 신앙 선배들의 개혁정신은 무엇을 뜻한 설명이었을까. 교회 정치는 목사 장로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말씀이 운동하여 정치를 해 나간다고 알고 있다. 복음 전하는 것이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 종이 아니라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분명히 살아 존재하면서 역사와 만물을 홀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신다.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미련한 마음이 더욱 어두워지고 악하여져서, 마음의 정욕대로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어, 남을 판단하는 그것이, 타락하고 버림받은 상태가 아니던가. 그렇게 불의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주어졌고, 그 사실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 하나님 뜻을 분별하게 되므로,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게 되고, 받은바 은사 따라 영적 예배의 삶을 살게 되는데 있어서, 교회가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성령께서는 구약에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오신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증거하시며, 교회가 설립되고, 천국이 확장되어 가게 하시고, 도의 초보를 버리게 하여, 성경대로 완전한데 나아가게 된다고 하는 체제개혁을 시행하게 되었는데도, 어찌하여 본래 상태로,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종노릇할 마음을 주셨을까.
성도는 사람의 종이 아니다. 온전한 정신이라면 종 되었던 집에서 건져내 준 하나님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내 의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었다면, 신앙도 필요 없고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다. 어리석도다.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아! 누가 꾀더냐? 계집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당연히 쫓겨나야 마땅하지만, 믿음을 따라 태어난 이삭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하시더냐. 예수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났고, 그리스도는 교회 머리가 되셔서 택함 받은 성도는 그의 지체가 아니더냐. 사람에게 속하지 아니하면 분쟁의 이유가 없고, 육체를 자랑하므로 분열이 되고, 지혜로 아니하여 분열된다고, 단합을 저해하는 요인을 바울은 밝히고 있다. 또한, 목사의 카리스마적 권위와 통치는 성도들의 신앙양심을 억압하며, 올바른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요소이고 보면, 어디까지나 모든 성도는 말씀의 통치를 받으며, 서로 교제하고, 각자의 은사 따라, 자발적으로 봉사하게 되는 것이 교회생활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왜 심순애가 이수일의 사랑을 저버리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와 금목걸이에 유혹을 당했던가. 이는 그 뜨거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황금에 눈이 어두워서 유혹당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느브갓네살왕이 사드락과 메삭, 아벤느고에게 우상에게 절하면 풀무불에서 살려준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혹 구해주시지 않는다할지라도 절대로 그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했던 세 친구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진정으로 깨닫는 신앙인의 자세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하는 대로 진리와 함께 기쁨을 누리는 자유가 있고 그에 맞서 대항할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교회는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교회는 성경 말씀으로 설립하여 자라게 하신다는 교회개혁론이 이제는 성도들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 자체를 분토, 만물의 찌꺼기, 죄인의 괴수, 깨어진 질그릇 중의 한 조각, 버러지 같은 인생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슨 힘이 나오겠는가. 노을 앞에 선 인생이고 보면, 삶이 대단하고,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 같아도, 결코 대단한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어있지 않게 되면 견디어 낼 수 없는 인생길, 폭풍 앞에서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만이 소망 되시고 생명이시다. 그 사랑 깨닫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악독한 짓만 하다가 간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의 법만 존재한다. 사랑의 법이 아니면 억압이다. 억압은 자유함이 없다. 결국, 여호와를 알고 깨닫게 될 때, 탐욕과 허망한 것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고,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게 된다. 그런데 아직은 옛사람의 소욕이 남아 있고, 중생은 했으나 괴로움을 당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 내 능력으로는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의 주권을 실제 몸으로 체험하는 교육이고, 세상 모든 권세와 통치 역시, 선하든 악하든 궁극적으로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세상은 남루하다. 이 우울의 시절에, 의복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기운 북돋워 주는 말씀이 있기에 소망하며 감사한다. 더 이상 고통을 제공하지 말라는 바울의 당부와 처음 복음 전할 때의 사연을 회고하며, 바울은 자신과 멀어지는 갈라디아 형제들이 다시 복음 진리 안에서 가까워지고, 자유함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하면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한다. 그 말씀이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