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행위
마틴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초판(初版)에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다.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감을 준 구절이다. 그런데 루터는 야고보서 2장 17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구절이 행함을 강조하는 구절이라고 오해함으로 인해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 절하했다고 본다.
바울은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므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루터는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의 입장에서 야고보서를 평가 절하함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로마서는 믿음을,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가? 잠시 생각해 보며, 성도로서의 올바른 삶은 어떠한 삶인지 정리해 보고자 한다.
로마서가 믿음을 강조하고 있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들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는 야고보서 2장 17절의 말씀을 행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18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행함을 강조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장 18절의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는 말씀은 행함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다. 믿음이 있다면 믿음에 의한 행함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믿음이 있는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믿음이 없어서 행함이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믿음이 없어도 행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외식 또는 위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행함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반드시 믿음의 행위를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 선생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일테니, 너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보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너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는 말은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데도 가능하다고 하니 가능하다면 한 번 보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오해해서 행함이 있어야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행함을 강조하는 구절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없어서 행함이 없는 것을 누가 탓하겠는가? 그렇지만 믿음의 분량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믿음이 있는 만큼 믿음의 행위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비례해서 행함이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을 무엇으로, 어떻게 보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자 같이 위선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한 주를 시작하면서 나는 믿음의 행위를 하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위선자로 살고 있지는 아니한지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