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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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5-29 21: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사형제도는 성경적인가?


요즈음 일부 정계의 움직임과 발맞추어 교계 일각에서도 사형제도 반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줄 로 안다. 그러나 적어도 거 교계적인 운동을 전개하려면 먼저 그 운동이 성경적 교훈에 합당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이 갖는 광범위한 영향력만큼 성경의 원리를 밝히는 데에도 충실한지 의심스럽다. 필자는 사형제도가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사형제도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몇 가지 그 이유를 천명코자 한다.

 첫째, 사형제도는 하나님께서 국가에 부여하신 칼의 권세이다.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분들은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형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집행이므로, 개인이 개인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전제에서 접근하지 말 일이다. 국가를 분정(分定)하셨을 뿐 아니라, 사적인 보복을 금하셨으나 국가 공권력에 치리의 칼을 부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롬13:4). 칼의 권세는 사형이라는 정점을 갖는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사형 제도를 반대한다면 하나님께서 국가에 칼의 권세를 부여하셨다는 성경과 다투는 일이 될 것이다.

 둘째, 사형제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소명하시는 방편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의 소명은 상황의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을 학대하고 멸시하였지만 그가 죽음이라는 상황에 처하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말씀을 받아들였다. 어떤 성직자들은 사형수를 좋은 사람으로 교화시켜 놓으니까 형을 집행한다고 항의하지만, 사형수가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더라면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소명의 상황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만일 역사의 전 진전과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회개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교회는 사형 제도 폐지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피택자 한 사람이 빠진 천국은 임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성경은 공의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다윗 왕 시대에 삼년이나 기근이 들었었는데, 이는 사울이 기브아 사람들을 죽인 일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공의를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이유를 밝히셨다. 이에 사울의 가솔들 중에서 일곱 명을 교살하자 비로소 비가 내렸다(삼하21:).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했던 것도 공의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공의를 세우기 위한 방편을 의미할 뿐이었다. 기독교는 공의의 충족없는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공의의 충족없는 용서가 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교회는 무조건적인 사형제도 폐지운동을 벌임으로 기실 공의 폐기운동을 벌이는 것이 될까 두렵다. 성경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고 가르친다. 주께서는 목숨 제일주의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마16:25-26). 기독교는 목숨 제일주의보다 무한히 높은 차원의 것이다.

 넷째, 성경은 사람의 죽음은 경과이지 결과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사람의 죽음은 생명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야 진정한 생명은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성경 역사에 제일 먼저 목숨을 잃은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은 아담이 아니고 의인 아벨이었다. 육체의 죽음을 인생사의 모든 것의 끝자리로 본다면 수 많은 순교자들을 보유한 기독교는 그 교리들의 정당성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아벨은 지금도 살아 있다. 사형을 당하여도 회개하면 영생을 누릴 수 있다.

 다섯째, 오판에 대한 문제는 별도의 이슈로 취급되어야 한다.
 사형제도에 있어서 오판은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하지만, 그것이 이 제도를 폐기해야 할 정당성을 세우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될 별도의 문제이다.

 여섯째, 사형은 교화가 아닌 형벌에 그 목적이 있다.
 성경은 "징계"(chasetisement)와 "형벌"(punishment)을 구분한다. 전자는 사랑에 근거한 교화에 목적이 있으나, 후자는 순전히 죄에 대한 보복이다. 후자는 보상 불가능한 죄의 경우에 한정된다. 이 세상은 징계만으로는 적절치 않은 사악한 죄가 있는 곳임을 성경은 잘 가르치고 있다.

일곱째, 사형제도가 범죄예방효과를 갖지 못한다는 통계에 의한 주장이 있다.
 사형이라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에 해당하는 죄를 감행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확실히 교화의 여지없는 형벌의 대상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그러한 사람의 수효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통계는 사형제도 폐지보다는 사형제도 존속 입장의 강화의 정당성을 반증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사형제도 폐기 운동자들은 살인자에게 피살당한 억울한 의인의 인권에 대해서는 간과하여도 좋은지 묻고 싶다. 원한에 사무친 피해자들에 대한 정당한 설득없이 반대운동만 전개하는 것은 불공평의 극치이며, 아름다운 이름의 불의이다.

 자연인에게 듣기 좋은 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에덴의 거짓말이오,
다음은 '지옥이 없다' 하는 보편론적인 복음주의의 주장이 그것이다. 

'사형제도 폐지' 역시 얼핏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시류에 아부하지 말고 굳건히 성경을 따라야 한다. 사형제도는 유지되어야 한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말한다.  "개혁주의 변증가는 '이성의 진리'(truths of reason)를 희생시켜 '사실의 진리'(truths of fact)를 세우려고 애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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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자가 되자
生과 死, 시작의 삶과 끝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