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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22회 학술발표회 비대면 개최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 1902-1908년 시기를 중심으로’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교회의 특징’ 두 편의 논문 발표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이재근)는 지난 2일 제422회 학술발표회를 비대면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는 최상도 교수(호남신대) 사회로 두 편의 논문, 김일환 박사(서울장신대)의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 1902-1908년 시기를 중심으로’와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의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교회의 특징’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디아스포라’ 세계적 현상, 다양화, 진행 속도도 빨라
특히, 이번 발표회에서 정병준 교수는 “디아스포라 현상은 인류 역사만큼 오래되었고 세계적 현상이다. 오늘날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과 신자유주의 경제 세계화로 인해 국가 간에 교류와 상품과 자본의 이동이 빨라졌다. 그 결과 디아스포라 현상도 다양화되었고 그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이주기구(IOM,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nts)의 통계에 따르면, 이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2000년에 1억 7천320만 명(2.8%), 2010년에 2억 2천1백만 명(3.2%), 2020년 현재 2억 8천6십만 명(3.6%)에 해당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숫자는 1억 6천4백만 명에 달한다고 국제기구 자료를 인용했다.
정 교수는 “세계적으로 이주자가 급증하고 다문화사회가 확대되면서 20세기 후반부터 ‘디아스포라’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문화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 교육학, 문학, 종교영역 등 광범위하게 발전해 왔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디아스포라에 대한 성서연구와 선교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외국인노동력이 대량 유입되었고, 1998년부터 탈북민이 입국하면서 한국교회는 이주민에 대한 성경적, 선교적 관심이 시작되었다. 디아스포라로서 국외 한인교회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중심으로 21세기에 들어와서 확대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논문의 목적은 해방 이전 북간도, 서간도 중국 내부(상해, 남경, 북경)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역사와 특징을 비교하여 분석하려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의 징계와 은총의 도구로서의 선교적 의미
정 교수는 ‘디아스포라’의 성경적 정의를 헬라어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는 동사 ‘디아스페이로’(διασπείρω)에서 파생되었고, 이 동사는 방향과 운동을 나타내는 접두사 ‘δια’와 ‘씨를 뿌리다’ 혹은 ‘흩어버리다’를 뜻하는 ‘σπείρω’의 합성어라고 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디아스포라’는 파괴과정, 물체의 분해가 의미이며, ‘디아스포라’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은 기원전 25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70인역 성경을 번역한 유대인 랍비들이었다고 하면서 그들은 바벨론 포로와 관련된 고라와 가루트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만 ‘디아스포라’를 사용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 됨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우주적 샬롬과 생명을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는 선교적 의미를 강조했다.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렘 29:5-7)에는 그러한 디아스포라 신학이 잘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70인역에 사용된 ‘디아스포라’에는 이러한 예레미야의 신학이 반영되어 있고, 그 안에는 유대인에 대한 징벌과 은총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약성경은 ‘흩어진 유대인들’(요 7:35; 약 1:1)과 ‘유대인 기독교인들’(벧 1:1)에게 ‘디아스포라’를 사용했고, 유대인·이방인 기독교인들(행 8:1, 4; 11:19)에게 ‘디아스페이로’를 사용했다고 하면서 신약성서는 인종의 차별을 넘어서 완전하게 선교적 의미로 디아스포라를 사용했으며 그런 차원에서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특징을 선교적으로 살피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한인 다아스포라 동기 경제난, 독립운동기지, 신앙의 자유와 이상촌 설립
정 교수는 서간도, 북간도, 중국 본토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역사와 특징들을 열거하면서 한인들이 간도로 이주한 동기는 첫째, 경제난으로 인한 농업이민, 둘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동기, 셋째, 신앙의 자유와 이상촌 설립을 위한 이주였으며, 함경도 지역의 이민이 많으나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도 한인들이 이주했다고 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시대부터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확대
정 교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시대부터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확대되었다. 신약시대 교회는 인종주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디아스포라’는 모든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후반 세계화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가 디아스포라로 살아간다. UN, 국가, 다양한 학문 영역은 ‘디아스포라’를 연구하고 있다. 아쉽게도 한국교회사는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 대한 연구가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이 연구는 해방 이전 만주와 중국에서 살아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의 역사와 특징을 살피고 비교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간도와 북간도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비교
정 교수는 서간도와 북간도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를 비교할 때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서간도 교회는 축소되었고 북간도 교회는 확장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면서 서간도 교회 수는 20년이 지나도록 14개-59개 사이를 오가며, 교인 숫자도 2,227명-5,992명 사이로 큰 성장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반면 북간도는 교회 숫자가 87개-177개로 그 성장폭이 무척 넓으며 교인 숫자도 4,749명-11,196명으로 큰 증가 폭이 있었다고 했다. 재정적인 면을 살필 때 서간도 한인교회는 전쟁과 자연재해와 같은 위기가 있을 때 재정의 낙차가 매우 컸고 그 회복의 속도가 오래 걸렸으나, 북간도의 교회는 위기가 있어도 재정적 낙차의 폭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회복 속도도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종합해 보면 “서간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는 사회 경제적으로 훨씬 위험하고, 어려운 조건 속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내륙에서 일어나는 전쟁 국공내전, 만주 사태로 인한 타격이 북간도의 한인교회들보다 훨씬 크게 작용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인 사이의 관계도 나쁘며, 일본에 대한 중국 관리의 반감이 한인들에게 더 부정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컸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어 북간도 한인교회는 일본군에 의해 1920년 경신참변의 피해를 크게 받았으나 그 피해를 빠르게 회복하는 탄력이 있었고, 교회가 그 사회에서 지닌 지도력에 큰 차이가 있었다고 하면서 북간도의 간민회와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은 대다수 교회 교인이었다고 말했다.
북간도에서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전에 경제적 사회적 생활 공동체
서굉일 교수의 지적처럼 북간도에서 교회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교사와 외국선교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어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는 자위 수단이 될 수 있었고, 기독교 학교에서 자녀를 교육시키기가 용이했으며, 타국 생활의 긴장에서 정신생활의 안정을 제공했다고 했다. 그리고 국가의 보호가 없었기 때문에 한인들 사이 상호부조 하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신앙공동체가 경제적 자립을 위한 도움을 제공했었고,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전에 경제적 사회적 생활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서간도 교회는 대부분 생존을 위한 유민들, 북간도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구상
그러면서 서간도의 교회들도 어느 정도 이런 역할을 하였지만 한인들의 숫자 규모와 분포 범위로 볼 때 응집력이 훨씬 떨어졌고, 한인 교회 지도자들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과 중국 관리들과의 관계성도 교인들이 유입하는 요인이 된다고 했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사회적 신분을 보았을 때 서간도의 경우 대부분 생존을 위해 압록강을 넘어 정착한 평안도 유민들이며, 물론 유하현에 독립운동을 위해 찾아오는 지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소수였다고 했다. 서간도 한인교회 안에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지적인 작업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북간도의 경우 생존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다수이지만 이상촌을 건설할 목적으로 이주하는 사람, 종교적 이유로 찾아오는 사람,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정착하는 사람 등 다양한 단체들이 있었다며, 북간도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신앙적 철학적 근거가 있었다고 했다. 상해, 남경, 북경의 한인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지식인 계층이었고 YMCA와 선교사를 통해 국제질서에 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이들은 상해와 남경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3.1운동에 대해 구상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임시 정부를 설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북경의 고려기독청년회는 처음에는 박용만의 무장항쟁노선을 지지했으나 안창호의 흥사단에 흡수되었으며, 연해주와 미주 그리고 일본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 대해서도 그 역사와 특징을 종합적으로 비교 연구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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