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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1회 학술발표회 열려
민족복음화운동 시기 한국장로교회의 국내 전도정책 비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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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정병준)는 제431회 학술발표회를 지난 1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김일환 이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지역이사)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이고은 교수(전남대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가 ‘대한제국 시기 역사교과서 『대한력사』(1908)의 저술 문제’와 최송이(서울장신대 박사과정) 발제자가 ‘민족복음화운동 시기(1964년-84년) 한국장로교회의 국내 전도정책 비교 연구; 예장 통합, 예장 합동, 기장 교단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특히 최송이(서울장신대 박사과정) 발제자는 1964년에서 1984년 민족복음화운동 시기에 한국장로교회의 국내 전도정책 비교 연구한 것을 발표했다. 그는 “1964년 개신교 17개 교단이 연합하여 ‘전국복음화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1970년에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10년 이상 진행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시기는 군사정권 집권 시기(1961-1979)라서 정치, 사회적으로 국민들의 활동 제약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전 국민 복음화’라는 기치 아래 네 번의 대형 집회를 열었으며, 교단마다 복음화운동을 열정적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결과로 한국교회는 단기간에 양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발제문에서 ‘민족복음화운동 시기에 교단들은 어떤 운동을 진행하였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73년 개신교 교단 대부분은 복음화운동의 일환으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에 참여했지만 이후 ‘엑스플로 74’(1974), ‘민족복음화대성회’(1977), ‘세계복음화대성회’(1980)와 같은 대형 집회는 교단이 아닌 교회별, 개인별로 참여하였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하 예장 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하 예장 합동), 한국기독장로회(이하 기장)의 총회록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 연구했다고 했다.
세 교단은 1964년부터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까지는 초교파적으로 연합해 ‘복음화운동’을 하다가 1971년-1973년을 기점으로 각 교단 자체 운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했다. 이어 1984년 선교 100주년 기념을 위한 10년 프로젝트를 교단별로 각각 진행했다고 했다. 그는 이번 연구 논문에서 세 교단의 특징은 전도 정책이 시기별 내용, 전도 방법, 재정 마련책, 교세 확장 성향의 운동이란 점에서 유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민족복음화운동 시기에 세 교단의 전도 정책 특징에서 시기별 전도 정책은 1964~1966년도에는 교단 내 교회 자립 집중과 교역자 생활비 지원, 교회 부흥을 위한 전도 집회 개최, 군목사업은 전도보다는 교단 군목 수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전국복음화운동을 진행하고 교단 내부는 각 전도 사업이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웠다고 했다.
1967-1970년에는 세 교단의 국내 전도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면서 당시 정권은 경제성장을 목표로 노동집약적 수출주도형의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농촌과 도시를 아우르는 전도 활동을 했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영상기와 문서를 활용한 시청각 전도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교단별 주요 전도 정책이 되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전도 사업이 대부분 지역을 기반으로 진행되면서, 공장과 교도소, 병원, 학교 등의 전도 사업은 상대적으로 집중이 약해졌고 이후 이 사업들은 개신교 교단들이 연합하여 초교파적으로 운영됐다고 말했다.
1971년 이후 세 교단의 전도 정책은 ‘민족복음화운동’에 집중하였고, 이 운동은 곧 ‘교회 개척운동’으로 연결되었다고 했다. 전도 활동으로 교인 수가 늘어나면서 교회 개척이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 교단은 1974년 ‘한국 선교 100주년’을 10년 앞두고,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방법으로 ‘교회 개척운동’을 진행하기로 각각 결의하였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과거 한국장로교회가 선교 기념주년을 기념하는 방법이기도 했다고 하면서, 이후 세 교단은 1984년 100주년이 될 때까지, 각자 목표로 세운 교회 개척 수에 도달하기 위해 전도 정책들을 세워나갔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세 교단은 전도 방법과 재정 마련에서도 유사점을 보였다고 하면서 부흥 집회는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된 전도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교단들은 1964-1984년 동안 농촌 지역과 도시 지역을 포함해 군대, 경찰, 교도소, 병원 등지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고 했다. 때로는 초교파적으로, 때로는 노회별로 연합하여 집회를 진행하였다고 했다. 이를 위하여, 특별히 선정된 부흥강사가 집회마다 활동하였으며, 교회가 자립하고 개척되는 것에도 집회가 활용되었고, 영사기와 문서를 사용한 시청각 전도도 세 교단이 주로 활용한 전도 방법이었는데 시청각 전도는 영상을 접하기 어려운 지역일수록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전도 사업 진행을 위해 세 교단이 공통적으로 세운 재정 마련책은 ‘헌금’이었다. 총회주일 헌금, 8·15 해방주일 헌금, 추수감사주일헌금의 1/10과 총회, 노회 상회비의 1/10이 전도 사업의 예산으로 편성했다고 했다. 그러나 헌금 납입이 생각처럼 원활하지 않자, 각 교단 전도부는 총회 때마다 헌금 납입을 호소하거나, 차선책으로 해외선교부에 지원을 요청하거나 선교 기금을 추가로 모금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고 했다. 교단마다 개척된 교회의 자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개척 준비금을 대여하는 기금을 운용하였다고 했다.
1964년에 시작된 ‘전국복음화운동’은 1970년에 이르면서 ‘민족복음화운동’으로 전환되었으며, 세 교단도 ‘복음화운동’을 교단의 주요 정책으로 삼고, 전도 사업을 진행했다고 했다. 그러나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이후, 세 교단은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교회 개척운동’을 진행하기로 하면서, ‘복음화운동’의 성격이 달라졌다고 했다.
초기 복음화운동은 전도 운동의 의미가 컸으며, 전도로 인하여 교회 개척이 파생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1974년부터 시작된 ‘교회 개척운동’은 개척할 교회 수를 미리 정해놓고 그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달랐다고 하면서, 1975년 이후 각 교단의 총회록을 보면 교단마다 개척된 교회 수와 목표한 교회 수의 차이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또한 1984년이 가까워질수록 교회 개척 수를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향도 나타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고 전했다. 1974년 이후 교회 개척운동을 진행하면서, 예장 통합과 예장 합동의 전체 교회 수는 2배 가까이 증가하였고 기장 또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결국 1974-1984년 세 교단의 복음화 운동은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교회 개척운동’으로 전환되었고, 교세 확장·교회 배가운동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발제를 마무리하면서 이 시기에 각 교단 전도부에는 복음화운동을 담당하는 부서 외에 다른 부서와 위원회가 있었음에도 연계되거나 확장되지 못했다고 하면서 당시 운동이 교세 확장에만 집중했던 까닭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업들에서 교인 수가 늘어나고 교회가 개척되려면, 교회 개척 사업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목표한 교회 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성과가 낮은 사업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자본주의 경제개념이 교회 사업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복음화운동’이라는 개념은 이 시기 전도 정책에서는 ‘축소’되었다고 본다고 하면서, 총회 주도로 ‘민족복음화운동’을 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이 사업이 후반에 이르러 ‘교회 개척’에만 집중된 점도 아쉽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유신정권-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민족복음화를 위해 교회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민족복음화’란 말에는 ‘복음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도 있는데,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민족’들은 이 시기, ‘교회 개척’을 위해 노력하던 교회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발표를 마무리했다.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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