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_ 이야기를 마치며
성경 속의 인물 (17)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명성과 달리 개인의 삶은 고달팠던 이가 두보(杜甫)였다. ‘도연명은 좀 멀리 있는 듯하고, 이백은 약간 높이 있는 듯한데, 두보는 곁에 있는 것 같다.’라 했던 대문호 루쉰의 표현처럼, 고위 관리에게 관직을 청하는 시를 올리던 구차함, 안사의 난 중 굶어 죽은 어린 아들을 애도하는 시를 쓰던 참담함, 열흘 가까이 굶주리다 간만에 대접받은 음식에 떠다니는 배 위에서 숨을 거둔 쓸쓸함까지 그의 모습은 성인과는 거리가 먼, 자욱한 전란 속의 생존 본능이었다. 한 잔 술에 죽음과 삶이 같아진다(一樽齊死生) 읊던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취중에 호수에 비친 달을 따려다 익사했다던 낭만적 모습과는 다소 느낌이 다른, 두보의 삶에서 유일하게 평온했던 시절이 지금의 쓰촨성 청두에 초당을 짓고 머무르던 4년여였으니, 이곳에서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니(好雨知時節)’로 시작되는 춘야희우(春夜喜雨)가 지어진다.
모세가 계명에 대한 교훈을 밝히던 신명기 11장에는 적당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여호와의 섭리가 기술된다. 씨 뿌린 후 물을 대야 했던 애굽 땅과 달리,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언약의 가나안 땅은 10월경 씨를 뿌리고 3월경 작물을 거두는 곳이었다. 파종 때 씨앗을 잘 자라게 하는 가을의 ‘이른 비’와, 수확 때 곡식을 더욱 무르익게 하는 봄의 ‘늦은 비’가 여호와의 은혜로 내려져야 했던 곳이 가나안이었듯, 성경 속 인물 하나하나를 정하신 때에 부르시고 또한 성장의 각 과정에서 시련의 계기를 통해 찬양케 하심은 여호와의 자비로운 은혜였다. 종교개혁자에게 이신득의(以信得義)의 대원칙을 각성케 한,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Magna Carta)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으로 퇴색되지 않는, 언약에 토대하여 은혜로 베풀어지는 영광의 유업을 전한다.
돌이켜보아 인간적 조건을 고려치 않으심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로 행하셨던 섭리는 모든 이루어짐이 은혜임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함, 곧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 무능을 계시하시기 위함이었다. 윤리적 기준으로는 드러나지 않았기에 깨끗하다 착각하여도, 심령을 감찰하시는 여호와 앞에 의인은 하나도 없음을 선언하심처럼, 혹여 위인처럼 설교되어질 어느 인물일지라도 죄인된 근본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류의 조상이 이르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창 3:12) 타락하게 했노라는 반문에서, ‘하게 하신’ 당신의 섭리를 은연 중 공박하는 가증됨을 살필 수 있다. 진리로 자유케 하신 은혜를 변명의 합리화로 악용하는 사례가 초대 교회에도 있었음은,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라(벧전 2:16) 일렀던 베드로의 당부 속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근원적 죄성 가운데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건져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방적 사랑을 예표하는, 북왕조 패망과 회복 예언의 호세아서를 상기(想起)해 본다.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는 첫 소선지서의 요절은 역사서 및 대선지서의 결론적 압축이자 그리스도 수난과 부활 사역의 핵심을 예언적으로 간추려 준다.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여호와,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아래 성도 간의 선한 연합을 이루게 하시는 여호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시는 여호와. 그 영원히 복된 이름을 경외함만이 인간의 마땅한 본분임을 되새기며 성경 속의 인물 연재를 접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