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압박과 혼돈의 사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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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 관한 어떤 질문도 피하지 않고 논의함으로 신앙의 근육을 키운다 하는 ‘CBS 신학펀치’란 방송을 우연히 접했다. 진행자의 독특한 언행은 차치하더라도 몇몇 패널들의 신학적 건전성에 논란이 제기되던 프로라 챙겨보진 않았었는데, 마침 성경 기사와 고고학적 물증과의 관계가 다뤄지는 중이었다. 성경영감설의 문제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최근 사임한 피터 엔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근동 고고학 전공의 교수님은, 성경의 역사성과 관련해 의심의 해석학과 믿음의 해석학을 대조해 제시했다. ‘우연의 학문’인 고고학이란 문서 자료와 병행되어야만 하는 한계임을 지적했고, 성경 외 자료에서 추가 증거가 나오지 않을 시 성경의 주장을 불신으로 속단하는 풍조를 비판하는 한편, 성경 자체의 증언을 믿는 자세로부터 출발함이 기본임을 결론으로 강조했다. 좋은 배움 뒤에 찾아든 의문은, 과연 성경 자체의 증언을 어떠한 근거로 신뢰할 것인가의 원론(principle)이었다.
언약자손을 시험하신 내내 ‘왕이 없던’ 기준 규범의 부재가 모든 혼란의 근원이었던 사사기의 기간은 주전 1390년 여호수아의 죽음부터 1050년 사울의 등극까지 약 340년 정도로 추산된다. 전기설을 따르자면 가나안 정복의 시작은 1446년 출애굽 시점에서 40년이 지난 일이었고 멸절에 소요된 7년은 1406~1399년이 되는데, 이때 순종을 시험하시려 남기신 열국(삿 2:21)은 이스라엘의 배역 때마다 무서운 채찍이 된다. 심판에 따른 피어린 간구 때마다 신정 정치적 성격의 통치자로 세우신 옷니엘부터 삼손까지 사사(士師)들의 숫자 12는, 여호와의 법을 망각하고 자신의 소견을 따르는 우매(愚昧)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백성의 근원적 무능력을 여실히 드러낸다. 동쪽의 암몬과 모압, 서쪽 해안의 블레셋과 에글론, 남동쪽의 미디안,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에 이르는 사면의 족속들 가운데 가장 질겼던 시험의 가시는 블레셋이었다.
오리엔트 문명을 유럽으로 전하는 역할을 맡았던 에게 해 남단의 크레타 섬은 당시에는 블레셋의 발원지였다. 1500년~1200년 사이 근동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유독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단일 도시 중심의 소왕국들이 어지러이 편재(遍在)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이 여호수아를 통한 땅언약 성취섭리가 수월히 이루어진 배경이었음은 앞서 살핀 바 있다. 주변국과의 외교문서에서 ‘종’으로 지칭되었던 이 토착 왕국들을 가나안에서 몰아낸 이스라엘이었으나, 종교적 신념 외에는 딱히 구별된 정치·군사 면의 장점이 없었기에 이후 거꾸로 지속적인 침략에 시달렸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철기 문명의 충격파를 처음 가나안에 던진 이들은 블레셋을 위시한 해양 민족이었으며, 애굽에 분패 후 가나안으로 밀려왔을지라도 이들은 팔레스타인 남서부의 비옥한 지역에 5대 도시를 세웠고 세련된 미케네식 도기 문화와 혁신적 조선 및 건축 기술을 보유했던 선진 세력이었다. 후기 청동기 문명에 머물렀던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이 철병거를 갖춘 블레셋과 그나마 겨루었던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삼손의 악전고투 덕택이었다.
계몽사상과 과학혁명에 도취했던 회의론자들은 19세기까지 어느 곳에서도 유적이 발견되지 않던 성경 속 앗수르의 실존에 대해 조소했으나 레이어드(A.H. Layard)의 니네베 발굴은 이를 잠잠케 하였다.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렸던 가사에서 발견된 두 개의 나무기둥을 가진 사원, 사자와 싸웠던 딤나의 포도원과 가까운 벧세메스에서 발견된 거대한 동물 옆 사람 형상이 묘사된 주전 11세기의 인장 등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오이디푸스와 헤라클레스를 섞은 신화로 삼손이 취급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에 등장하는 반인반어(半人半魚)의 다곤 신전에서 최후를 맞은 사사 삼손은 율법을 심히 거스른 부적격자였으나, 그 인생의 빛과 어두움은 모두 선하신 여호와의 계시적 유의미였다. 흑암과 광명을 일반으로 섭리하시는 여호와의 언약성취사적 계시 역사, 곧 성경 내 논리 구조의 맥을 잡음은 성경 증언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최우선적 선결 조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