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후 왕조의 타협과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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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읽힌 동양고전으로 꼽히는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는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을 말했다. 듣기 좋게 꾸미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낯빛에 인덕이 드물다는 지적은 세련된 말솜씨가 중요한 경쟁력으로 작용하는, 그로 인해 온갖 부작용이 난무하는 현 세태를 찬찬히 곱씹게 한다. ‘말이 유창하다고 그 사람을 등용치 않으며, 사람됨이 볼품없다고 그의 말까지 버리지는 않는다(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는 위령공편의 교훈 또한 아름다운 말이 항상 미덥지만은 않은, 언변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다.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활동하던 북이스라엘 예후 왕조의 주전 8세기는 지중해 연안의 실질적 패자로 군림하던 외형상 흥성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면의 사회적 분열과 종교적 부패를 외면한 거짓 선지자들의 낙관적 예언은 ‘듣기 좋게 꾸미는 말’의 가증함이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해 내리신 이세벨(왕상 21:23)과 아합의 후사(왕상 21:29)에 대한 언약은 엘리사의 때에 성취된다. 기름부음 받은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는 정변을 일으켜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이고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졌으며, 창밖으로 내던져 밟힌 이세벨의 시체는 개의 먹이가 된다. 4대 45년간(885∼841) 통치했던 오므리 왕조를 대신한 5대 89년(841~753)의 예후 왕조는 초반 난국에 직면하는데, 이는 대학살로 번진 숙청의 여파였다. 페니키아 출신 이세벨과 유다 왕 아하시야의 살해는 의존할만한 교역 대상 및 군사 동맹의 상실을 초래했고, 아합의 집에 속한 지도층의 몰살(왕하 10:11)은 국정의 마비를 가져왔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대외 정세는 북이스라엘에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853년 카르카르 전투에서 고전했던 살만에셀 3세는 반(反)아시리아 연합의 와해 속에 841년 시리아 지역을 장악한다. 당시 아시리아의 정책은 아시리아 본토와 ‘앗수르의 멍에 아래 있는 땅’으로 간주된 그 외의 영토를 구별하는 것이었으며, 명목상 독립국이나 사실상 속국이었던 나라들은 조약에 따라 무거운 공물의 부담을 져야 했다. 1846년 발굴된 살만에셀 3세의 검은 방첨탑(Black Obelisk)에 적힌 쐐기문자는 31차례에 달한 왕의 원정을 알려 주는데, 특히 두 번째 층에서 성경 본문에는 없는 야우아(예후의 아시리아어 표기)의 조공 기사가 841년의 사실로 확인되었다. 곧 철수한 살만에셀 3세는 다른 지역의 원정에 몰두하였으며, 이러한 배경 속에 아람의 하사엘은 이스라엘을 집요히 공략하였고 예후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상당한 영토를 잃고 위기에 처한다.
화살로 땅을 세 번만 치고 그침(왕하 13:18)으로 엘리사의 책망을 샀던 요아스의 아쉬움은 후계자의 성과로 만회된다. 아람 왕이 전쟁 중 전사하고 아시리아가 내분 후 쇠퇴기에 접어들며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한 8세기의 정황 아래, 여로보암 2세(793~ 753)는 다메섹과 하맛에 이르는 영역까지 진출하며 솔로몬 이래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였다. 주요 교역로를 장악함으로 쏟아진 부는 외견상 열심있는 종교적 행사로 이어졌으나, 사마리아 출토의 기록용 도기 조각에 여호와와 바알의 이름이 공존함처럼 당대의 제의란 이교와 뒤섞인 타락이었다. 세속적 기득권에 취한 이들이 가난한 형제를 강탈하는 빈부격차 중에 내가 얻은 재물의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호 12:8) 자찬하던 ‘회칠한 무덤’의 번창이 시대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좋은 역사란 단지 우리에게 좋은 역사’라 파헤친 에릭 홉스봄의 분석처럼 선지자의 경고는 뒷전으로 한 채 자기 좋은 대로 여호와의 존재를 이방신과 같은 요청적 신으로 격하시킨 영적 타락의 시작은 어중간한 타협의 자세였다. 바알 숭배를 일소하고도 금송아지 숭배를 내치지 못했던 예후 및 그의 계승자들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였으며, 이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마 5:37)’ 하신 참 선지자 그리스도의 가르침 앞에 오늘을 진실히 돌아보게 한다. 우리에게 더욱 선명한 언약성취구조의 성경 이해를 주심은 나 좋은 대로 절대 섭리를 끌어다 쓰며 지식의 자랑에 머무름 아닌, 공교함이 더해가는 비진리에 맞서 오직 사랑의 계명을 무기로 투쟁하도록 하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