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5) - 은혜 아래 행복했던 자, 바울 (下)
그림을 사랑하던 송의 휘종은 명시의 소절을 제목으로 한 그림대회를 곧잘 열곤 하였다. 한번은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亂山藏古寺)’는 화제(畵題)가 주어졌고, 머리를 싸맨 화가들이 내놓은 그림이란 거개 산을 그려놓고 그 숲 사이로 절의 일부가 희미하게 비치는 수준이었다. 그때 한 화가의 그림이 휘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폭 어디에도 절은 없었다. 단지 작은 오솔길에 한 스님이 물동이를 이고 올라가는 모습만이 담겨 있었고, 흡족한 휘종은 그에게 1등 상을 내렸다. 이 같은 시화(詩畵)의 오묘함을 흔히 ‘진공묘유(眞空妙有)’로 표현한다. 없지만 있는 것, 무언가 말하려 하면 사라지는 느낌, 실재하나 잡히지 않는 그 미묘한 떨림. 이는 사유의 주체로 존재하는 내가 곧 허(虛)임을 깨달아 본연의 청정심(淸淨心)에 귀의함이 구원임을 설하는 철학적 종교의 지적 유희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다메섹 회심 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기 위해 로마 제국의 곳곳을 20,000km 넘도록 강행하는 복음의 메신저로 쓰임 받은 바울은 인본주의의 극치인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특히 경계했다. 기복적 종교보다 더욱 반(反) 복음적인 철학적 종교는 내 속의 선한 씨앗, 곧 인식과 판단의 주체인 인간 이성을 중시함과 아울러 절대 진리 자체보다 이에 닿고자 하는 인간 의지의 용기를 찬양한다. 인본주의의 결정판 헬레니즘의 본산이던 아테네, 그곳의 공회로써 군신(軍神)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을 지닌 아레이오 파고스(Areios Pagos)에서 바울은 진리 변증을 위한 창칼 없는 전쟁을 치른다. 100여 미터 남짓한 석회암 봉우리, 하지만 올라서면 각종 돋을새김과 금박으로 치장된 휘황한 신전들이 즐비했던 아크로폴리스와 옥외 최고 법정이 있던 아고라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아테네인들의 요청으로 서게 된 바울은 우상 숭배를 비하하는 어조도, 당대 최고의 학식 앞에 주눅 든 어조도 아닌 그들의 종교성부터 언급(행 17:22)하는 침착함으로 웅대한 연설의 막을 연다.
우주만유의 주재인 참 신은 인조의 신전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는 사도행전 7장 스데반의 설교 내용이기도 함), 이 생명의 근원은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시고 삶의 과정을 예정하셨다는 것, 그 하나님의 기운을 힘입어 만물이 생동하고 있다는 것 등을 차례로 설파한다. 창조와 자연과 역사와 철학을 아우르는 명연설에 청중들은 잠잠했다. 그러나 작정된 심판의 주체 그리스도 ‘부활’의 이유를 증거함에 이르러 그들은 엇갈린 반응으로 동요했고, 일부는 경멸의 조롱까지 던졌으나 그 중에도 택정된 몇몇은 깨닫고 믿게(행 17:34) 되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절정을 논하며 바울은 세상의 어떤 지식도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에 비할 수 없음을, 다메섹 참회 이전의 모든 유익하던 가치는 그저 배설물에 불과했음을 밝힌다. 세인들이 비웃던 그리스도 ‘부활’의 권능을 당당히 선포하던 기독교 최고의 이론가는 또한 온전히 진리를 잡았다 자만하기보다 하늘의 시민권을 푯대 삼아 좇아갈 뿐임을 고백(빌 3:12)하는 겸손한 성숙을 우리에게 몸소 가르치고 있다.
성경 66권의 전체 구조, 곧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모든’ 성경의 의미를 생소히 배워가던 시절의 첫 교재는 박용기 소장님의 로마서 강의테이프였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듯 새로운 깨우침을 얻던 기쁨 가운데에서도 설익은 신앙에 못내 내키지 않던 구절은 8장 17절, 그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선 고난도 함께 달게 받아야 할 것이라는 바울의 단언이었다. 정황상 내 책임이 분명 아님에도 내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억울함, 지금도 간간이 나의 생산적인 시간을 멈추어 버리는 두통,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더러 입에 담는 위선의 가르침.. 과연 그런 시간마저 유의미한 가치로 봐야 하는지의 고민을 넘어섰던 계기는 이미 접한 바 있던 이사야 53장을 재차 깨우쳐 읽어가면서였다.
유대인들이 금서(禁書) 취급하던 이사야 53장, 영광스런 메시아의 모습이라기엔 너무나 비참한 묘사를 때로 곱씹는다. 누군가 나를 오해할 때 흉악범과 동류로 수치를 당하신 그분을, 삶의 무게가 원망스레 힘겨울 때 찢긴 어깨로 내 십자가 대신 메고 골고다에 오르신 그분을 떠올린다.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았던(고후 1:09) 바울의 수고를 알아주던 이는 많지 않았다. 외롭던 그에겐 아들과도 같던 디모데에게 유서처럼 남긴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당부한다. 허탄(虛誕)한 거짓 진리를 경계하고 근신하면서 네게 주신 고난을 기꺼이 받으라고. 간질로 추측되는 육체의 가시를 평생 걸머진 바울이었다. 세 번이나 간구했으나 가시는 끝끝내 바울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시야말로 자신을 낮추고 오직 여호와만을 의지케 한 바울 삶의 가장 큰 축복이 되었다. 인생이 약할 그때에 주의 능력만이 강하게 드러나기에 온갖 멸시와 핍박을 기뻐했던 바울, 세상은 그의 가시를 고통으로 평했으나 예수는 그의 가시를 승리의 면류관이 되게 하셨다.
이재규(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