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 (7)-언약 성취로 맺게 하신 믿음의 행위, 아브라함
90년대 후반 국내에 개봉되었던 ‘인생은 아름다워’처럼 제목의 함의(含意)를 길게 새겨본 영화는 흔치 않았다. 순탄한 상황 속의 긍정은 어렵지 않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 속의 긍정이란 소중한 가치의 위로일 것이다. 그런 긍정의 힘을 품은 이탈리아계 유대인 귀도 오레피체, 그는 초등학교 교사인 도라와 꿈결처럼 사랑에 빠지고 몇 년 뒤 아들 조수에가 태어나지만 행복하던 삶은 조수에의 생일에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감으로 균열이 온다. 가스샤워장에서 참혹히 죽어나가는 나치의 탄압을 앞두고 귀도는 아들에게 설명한다. 이건 1000점을 얻으면 탱크가 상으로 주어지는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가혹한 노동에 짓눌린 수용소 생활 중에도 사랑하는 아들의 순수한 유년시절을 지켜주기 위해 귀도가 늘 잃지 않던 서글픈 유머와 오롯한 애정은 마지막, 총살당하러 걸어가는 절망 속에 나무 궤짝에 숨겨진 조수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들을 안심시키고자 이건 게임일 뿐이라며) 찡긋 윙크를 보내고 우스꽝스러운 행군 자세를 보이며 죽음의 이별로 향하던 뭉클한 여운의 장면까지 그렇게 잔잔히 이어진다.
기복적 신관(神觀)의 혹자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누린 까닭은 이삭을 모리아산의 번제로 드리는 모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기적을 이루는 믿음엔 늘 과감한 결단이 수반됨을 강조한다. 또는 자유로운 개인을 정의하는 개념으로 실존을 사용하면서 ‘불안은 신으로부터 자유의 가능성’이라 설파했던 혹자는 자식을 죽여야 하는 비윤리와 신에 대한 믿음 간의 모순 속에 전율했던 아브라함의 주체적 결단을 부각한다. 주일학교 유년부 시절, 계단공과책에 그려진 이삭을 잡으려 칼을 쳐든 아브라함의 모습은 ‘믿음의 조상’으로 배우기엔 야멸찬 비정함으로 느껴졌다. 선생님께선 가장 귀한 것을 바쳤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힘써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셨지만 내겐 하나님께 잘 보이려 아들을 포기한 냉혹한 아버지 이상의 의미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차라리 귀도의 따뜻한 부정(父情)이었다면 창창한 아들 대신 자신을 제물로 드리고자 여호와께 건의하였을지도 모르고, 그쯤은 되어야 더욱 흠결없는 믿음의 조상으로 칭송할 수 있지 않을까.
본디 히브리 민족으로 일컬어졌던 유대 민족의 조상이 머물던 곳은 한때 수메르 제국의 수도이자, 정치와 교역의 중심지로 수많은 도시를 거느리며 번창했던 우르였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하류 지역으로부터 하란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이르렀기에 ‘강을 건너온 자’, 즉 히브리의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왜 여호와께서는 셈의 후예인 그를 굳이 함의 후예 가나안 족속이 뿌리내리고 있던 머나먼 세겜까지 인도하셨을까. 당대 거의 모든 근동 지역이 그러했듯 가나안 땅 역시 만신전의 우두머리 엘(El) 및 그 후계자 바알(Baal) 등이 숭배되던 다신교의 창궐 지역으로 결코 성별(聖別)된 장소가 아니었다. 바다와 사막으로 에둘린 지형으로 샤론 평야 등 몇몇 곳을 제외하곤 비옥보다 척박에 가까웠던 이 땅은 준(準) 농경민으로 정착해야 했던 아브라함의 후예들에겐 오히려 비와 바람과 풍요를 주관한다고 알려진 바알의 존재에 우상 숭배를 넘어 생활 의식처럼 의지하도록 하는 최악의 장소일 수도 있었다.
언급된바 객관적으로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아브라함이라는 인물 역시 믿음의 조상이라 수긍되기엔 다소 미흡한 모습이었다. 여호와의 언약만을 바라며 미지의 낯선 곳으로 떠난 결행, 정착하지 못했음에도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던(창 12:7~8) 진실함, 삼백십팔 인을 지휘해 롯을 구출해낸 과단성, 소돔 왕의 재물을 거절하고 여호와 언약을 신뢰하던(창 15:6) 지혜 등 귀감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 다른 신을 섬기던(수 24:2) 가문의 배경은 논외로 쳐도 - 두 차례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이려던 비겁한 잔꾀, 인위적 수단으로 자손 언약을 이뤄보려던 불신앙(창 16:2) 등은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단면을 보여준다.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각각의 인물들을 이끌어 가시는 과정은 대체로 그러할 것이라는 인간중심의 개연성(蓋然性)을 철저히 깨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장 뒤처진 순서였던 다윗, 가장 추악한 출생이었던 솔로몬, 가장 불결한 배우자를 가졌던 호세아, 그리고 가장 초라한 장소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여호와는 인간의 기준과는 정반대로 섭리하셨다. 75세 때 주신 언약을 25년간 기다리게 하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혼돈을 주셨으며,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창 18:11) 상황에서 이삭을 태어나게 하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확신을 주셨다. 끝이라 언약 백성이 완전히 체념한 그때, 그것은 어두운 절망의 끝이 아닌 밝은 소망의 시작임을 알게 하시는 여호와의 절대 주권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주저 없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믿음의 행위를 가능케 하셨다. 언약의 씨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견고한 그 믿음은 아브라함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아닌 기나긴 세월, 수없는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거치며 영글게 하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망의 열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