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작성일 : 09-11-26 04:35 |
<내 사랑 내 곁에> 당연해서 더 감사한 것들
ȭ < 翡> .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다’, ‘꼼짝도 못 하겠다’… 몸이 아프거나 피곤할 때 습관처럼 뱉던 말들이다. 그게 얼마나 큰 과장과 엄살이었는지 영화를 본 후에야 알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김명민의 체중감량 투혼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그는 루게릭 병에 걸린 주인공 종우 역을 맡았다. 루게릭은 지능, 의식, 감각은 정상인 체 운동세포만 선택적으로 사멸하는 잔인한 희귀병이다. 발병 원인도 치료법도 없어 대개 발병 후 3~4년 안에 사망한다.
의지는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얼마만큼의 고통일까. 감기에 걸리고 온 몸이 아파도, 약을 삼키고 화장실에 가고 이불을 덮는 건 내 의지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루게릭이라는 무서운 질병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병상에 누운 종우는, 자신의 뺨에 앉은 모기조차도 제 힘으로 쫓지 못해 힘없이 눈만 부라릴 뿐이다. 모기의 움직임, 모기가 내는 소리, 모기가 살갗에 침을 꽂고 피를 빠는 모습까지 생생히 지켜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고개를 흔들 수도, 손을 들어 모기를 내려 칠 수도. 자신이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방어도 못 한다. 모기는 얄밉게도, 그런 사람을 알아본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리하여 무력한 사람을.
종우는 스스로 몸을 씻지도 못한다.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다. 책도 책장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어야 읽고, 애인에게 문자가 와도 핸드폰을 열 수 없다. 내 의지는 여전히 강건한데 몸은 자꾸 굳고 썩어간다. 매일 매일, 죽어가려는 육체의 의지와 살고자 하는 정신의 의지가 충돌해 치열하게 싸운다. 그러나 그는 단 한번도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
단순히 이 땅 위에서 입고 사는 ‘옷’이라 하기에, 우리의 육체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매우 절대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을 보며 인간승리라고 한다. 그러나 종우처럼 굴복하고 무너진다 해서 패배자라고 할 순 없다. 루게릭은 이미 우리가 가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사투가 더욱 처절하고 아프게 느껴졌다.
종우에게는 사랑하는 지수가 있다. 지수는 장례 지도사로, 종우의 부모님의 장례를 치러주며 재회하게 된 오래 전 동생이다. 둘은 사랑한다. 그 땐 뭐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고, 희망도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근육이 마비되고,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자 상황은 달라진다. 하지만 영화는 사랑을 포장하기 위해, 혹은 스토리 상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 영화적 허용이라는 범주 속에서 ‘위기 속에서도 더욱 견고해지는 둘의 사랑’을 비추어냈지만 현실적으로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선 의문이 들었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가장 슬픈 부분은 종우의 죽음도, 그로 인한 둘의 사별도 아니다. 모기가 뺨에 앉았을 때 종우가 상상으로 제 손으로 모기를 때려잡고 제 발로 침대를 내려가 제 다리로 신나게 걸어서 공중전화를 거는 장면이다. 지수에게, 나 괜찮아졌다고 말하며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은 흡사 왈츠를 추는 초등학생 남자애처럼 들뜨고 신나 보였다. 상상 속에서 누리는 자유는, 상상이기 때문에 아름다웠고 상상이기 때문에 더 슬펐다.
고난은 축복이라고 했다. 하지만 저 정도 무게의 고난을 축복이라 여길 만큼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상대적으로 못한 자를 나와 비교 하며 위안을 얻는 정도이다. 하지만 언젠가 엄마가 그랬다. 그들을 보며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되어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엄마 정도의 신앙이 되려면 나는 얼마나 더 숙성(!)이 되어야 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수준의 신앙으로도 나는 충분히 많은 자유와 축복을 누릴 수 있어 무척 행복한 것 같다. 사지 멀쩡하게 태어나 건강한 몸과 맘으로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늘 감사하고 늘 행복해서 식상한데, 정말 늘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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