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로얄>에서 읽은 두 개의 표정
살고 싶으면 친구를 죽여라
실업자 천만 명, 등교 거부생 80만 명, 자신감을 잃은 어른들은 마침내 하나의 법안을 가결했다. 이름하여 신세기 교육혁명법, BR(Battle Royal)법.
선정된 학급의 아이들은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 안에서 마취가스에 취해 잠이 든다. 그 사이 목에 심장박동의 센서를 감지하는 쇠목걸이를 찬다. 그리고 도착한 섬에서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마지막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게임. 한 사람 이상이 살아남을 경우, 목걸이가 폭발하여 전원 죽는다. 목걸이를 강제로 빼내려 하거나, 불손한 짓을 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 개개인에게 할당된 무기는 모두 다르다. 냄비 뚜껑, 망원경, 낫, 총, 나이프, 전기 충격기… 무슨 방법을 쓰든,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
이후부턴 다양한 타입의 인간들을 볼 수 있다. 리더자가 되어서 그룹을 끌어가려는 타입, 정의감에 불타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타입, 정에 호소하며 눈물을 짜내는 타입,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방안을 모색하는 타입,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을 택하는 타입, 그 상황 자체를 즐기는 타입. 이미 절대 룰이 지배하는 게임에서 부당하느니, 인간적이지 못하느니 라는 하소연은 통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내가 살기 위해, 친구를 죽여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당시 이 영화를 봤을 땐 그 설정 자체에 몸서리가 처져 몇 달간의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인륜과 인간성에 대한 원초적인 ‘휘젓기’를 감당할 나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인간에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한 요즘 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이 안테나에 걸려 다시 보게 되었다.
웅장한 레퀴엠과 함께 시작하는 오프닝에 주눅이 들어 영화에 몰입했던 초반. 친구들이 죽기 시작하고 그걸 슬퍼하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눈물이 고였다. 그러다 누군가가 죽고, 또 죽고, 또 죽어나가는 모습에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다 나중에는 끔찍한 장면을 보고도 하품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기 직전 사지를 꿈틀거리거나, 살려달라며 구석에 모여 떨고 있는 아이들이 벌레처럼 (혐오스럽다는 게 아니라 미물 같았다는 의미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무뎌져도 괜찮은 건가.
사실 물리적인 죽음만 없을 뿐, 그 메커니즘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경쟁 구도이다. 그러나 그런 빤한 이야기를 뒤로 하고 인상 깊었던 표정 두 개를 이번 글에서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마지막 장면 즈음, 이 살인 게임의 총 책임자 역할을 했던 키타노 선생이 한 여학생에게 자기를 쏘라고 하는 부분에서다. 체념과 허무에 전복당한 얼굴. 편법으로 3명이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관심 없다는 제스쳐. 어서 자길 쏘지 않으면 널 쏘겠다며 총구를 들이댔을 때, 그 여학생의 남자친구가 그에게 총을 난사한다. 그 때 쓰러지던 키타노 선생의 총구에서 나온 것은 총알이 아니라 물이다. 우스꽝스런 포물선을 그리며 후두둑 떨어지던 물줄기. 그 장면에서 왜 그렇게 엉엉 울었는지 모르겠다. 살육의 전장에 있으면서도 무기력하게 소파에 누워있던 그가 딸아이의 전화가 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받을 때, ‘당신은 통화를 하는데도 역겨운 냄새가 난다’라는 딸의 말에 텅 빈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던 그. 그래서, 그렇게 무시당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이 배틀로얄이라는 게임이라고 서두에서 명시했음을 다시 상기했을 때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인륜이라는 것은 결국 관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여하에 좌우되는 것일 뿐임을 마주하는 순간, 절대 사랑이라는 것은 신만이 가능한 것인가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
또 하나는, 자신에게 화살을 겨누며 마음을 받아달라고 강요하는 남학생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비키라고 말하던 여학생의 눈이다. 그 또렷함, 당당함.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올곧은 눈빛. 그래서, 정작 무기를 들고 있었음에도 주눅이 들어버렸던 남학생이 있었다. 여학생의 그 표정은 마치 ‘내 목숨은 니 손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좀 과장해서,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저런 표정이었을 테다. 저게 바로 내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싶었다. 상대방이 갑이든 권력이든, 나는 당신에게 주저하지 않는다. 실세는 하나님이니까. ‘믿는 구석이 있는 당당함’은 내 얼굴을 빛나게 하고, 주위의 공기를 지그시 누른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람과 상황 앞에서 당당하다는 게 사실 쉽지가 않다. 다행히, 그게 되는 분들이 주위에 (드물게) 있다. 그 분들은 늘 신앙을 중심으로 삶을 그리는 분들이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당당함을 체득하는 방법도, 그래서 당당할 수 있는 마음도.
인간이 약하다. 그러나 여호와를 알고 믿는 인간은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