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 채울 것인가 놔둘 것인가
드라마 <더 킬링>
<더 킬링>의 부제는 ‘누가 로지 라슨을 죽였나’이다. 편 당 90분씩 하는 드라마가 두 개의 시즌 즉, 총 24개로 구성되어 아주 긴 호흡을 이어간다. 분량에서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미스테리 수사극이 아니다. 차라리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인간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결핍에 관해.
주인공 로지네 식구들은 얼핏 화목해 보이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전직 마피아였던, 그리하여 여전히 손에 피를 묻히고 사는 삶에 연루되고 있는 아버지와 현 남편이 아닌 첫사랑과의 사이서 태어난 로지를 자식으로 버젓이 드러내놓는 엄마, 소셜 접대 사이트를 드나드는 이모, 폭력성향을 보이기 시작하는 꼬마 아들. 이들뿐 아니다. 극의 중심축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투입된 두 명의 형사도 한 명은 친엄마로부터 방치되고 버려진 애정결핍으로, 한 명은 마약 중독에서 겨우 벗어난 상태로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허우적대고 있다.
<더 킬링>은 화면은 음울하고 극의 전개 속도는 느리며 시즌 2의 마지막 편이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번의 유머도 등장하지 않는, 아주 징그러울 정도로 드라이한 작품이다.
그 곳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누군가의 결핍이 다른 누군가에게 불행이 되어 닿는, 그리하여 연쇄적으로 파장을 만들고 그 파장의 동심원이 커져 남김없이 빛을 삼켜버린 비극의 덩어리들을 본다. 받아들여지지도 채워지지도 못한 결핍은 그 자체로 괴물이 되어 무고한 이들을 해하고 괴롭힌다.
그러나 결핍은 인간의 숙명이다. 결핍 앞에 온전한 자가 어디 있겠는가. 완벽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듯, 결핍이 없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에 대처하는 두 가지 타입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는 결핍의 처리 방식이 외부로 향하는 타입으로, 결핍 때문에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혹은 결핍 때문에 타인을 탓하는 유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대체로 자기 연민에 절어있고 결코 잦아들지 않는 분노와 화를 품고 있으며 원인이 늘 타인에게 있기 때문에 좀처럼 정신적인 성장을 하기 힘들다. 두 번째 타입은 결핍의 근원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유들이다. 이들은 첫 번째 타입에 비해 정신적으로는 성숙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과거에 대한 자책 등으로 스스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타입의 장점만을 고루 뽑아 완성한, 건강한 자아의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일단 우리는 결핍을 근원적으로 있게 한 자와 결핍이 형성된 근본 원인을 안다. 그렇기에 결핍을 채우려고 씨름하기보단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겐 ‘해석의 힘’이 있다. 무턱대고 덜렁 주어지는 사건 상황들은 아주 손쉽게 우리의 정신을 뒤흔들어 놓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국에 있다가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지옥문이 열리는 걸 본 적이 여러 번이지 않나. 해석의 능력이 있다면 그야말로 전천후다. 평정을 유지하는 능력도 세어지고 기간도 오래간다. 한마디로 강철 심리를 무기한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이것저것 핑계대며 투덜거릴 이유가 하등 없다. 결핍이 능력을 부른다는 원리도 있지 않나. 마이너스를 되려 플러스로 만들 수 있는, 어디에나 쓸 수 있는 영험한 능력의 소유자들이 아닌가.
병약하고 우울한, 갖은 결핍의 문제들을 가진 현대인들의 자화상, <더 킬링>. 로지를 죽인 범인이 마지막에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전혀 통쾌하거나 속이 시원하지 않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상실과 아픔을 헤집고 다니다 보니 심리적 녹다운까지 될 지경이다. 그들에게 잔인한 말일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괜찮다. 영적 양식을 거르지 않고 성실히 먹는다면 언제까지고 괜찮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