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소외’의 이야기
영화 <한공주>
영화 <한공주>는 한공주라는 여고생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에 어떻게 방기되는지를 느린 호흡으로 보여주고 있다. 얇은 유리 같은 예민함을 간직한 ‘여고생’은, ‘여자’와 ‘고등학생’을 더한 말이다. 불행히도 영화 속에서 한공주는 여자와 고등학생 중 어느 이름으로도 온전히 평화롭지 못하다.
폭력은 육체와 정신을 고루 초토화시킨다. 몸의 상처보다 더 두려운 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정서적 통증이다. 폭력의 가장 역겨운 메커니즘은 일방성 즉, ‘타자화’이다. 쌍방의 소통, 배려, 친밀함이 거세되고 오직 (폭력적) 주체의 의지만이 놓여 있는 것.
폭력 중에서도 성적 폭력은 무력으로 상대방의 성을 취하는 행위로 가해자에겐 일시적인 쾌락을, 피해자에겐 지속적인 충격을 남긴다. 특히, 성(性)은 특정한 관계를 맺은 사람에게만 허락한 내밀한 것이기에, 익명의 타인에게 무차별적으로 들추어지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살해 과정일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간에는 어떠한 관능도 은밀함도 없다. 살과 땀과 신음이 난무하여도 그것은 누군가의 욕구와 누군가의 생존이 절박하게 부딪치는 전투의 장일뿐이다. 아니, 전투라고 할 만큼 양자가 동등하지도 않다. 오직 폭력의 주체와 그에 난도질당하는 미약한 대상이 있을 뿐.
폭력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그 폭력이 별다른 큰 악의가 없는, 핸드폰 알람 끄듯 간편하고 감정 없는 폭력일 때 피해자의 정신과 마음은 쩍쩍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한공주는 그 무시무시한 폭력의 기억을 목젖 아래 깊숙이 삼키고, 전학 간 학교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해소되고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당하기 버거워 일시적으로 봉합해두었을 뿐이다. 그 위에 새로운 생채기를 만드는 것이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다. 물론 그녀를 집단 성폭행했던 또래 놈들처럼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인물은 없다. 그러나 보호자가 필요한 십 대 소녀에게 그녀의 부모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어른들은 자신의 입장과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한 이기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마모된 인간성 속에서 한공주는 철저히 소외되고 또 자신을 소외시킨다. (받아들임, 공감, 이해 같은 치유의 기제들이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영화는 가해자의 파렴치함으로 관객의 분노를 자극하는 전형성 대신, 자신이 진 고통의 무게를 가누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위태로운 십대 소녀의 일상을, 그녀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을 줄기로 하였다. 구덩이 속 공주만 제하곤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서 있는 세계.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그 속에서 나오려는 공주의 조용한 몸부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불편한 영화를 곱씹고, 대한민국을 슬픔에 잠기게 한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다 보니, 꼭 고난과 시련을 통해야만 하나님을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생긴다. 그 고통 자체가 너무 강력해서 나의 어느 한 부분이 마비가 된다면 과연 내게 하나님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불경한 생각도 들고 말이다.
어디에선가 ‘아내를 잃은 남자는 홀아비, 남편 잃은 여자는 과부, 부모 잃은 자식은 고아 그런데 자식 잃은 부모는 일컫는 말이 없어.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겠지’라는 대사를 본 적이 있다. 지금 진도에서 울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은 이보다 더 할 것이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는 건 결국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위로해 주어야 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마음과 정성을 그러모아 기도하고 싶다. 일찍 떠나간 아이들에게도, 그들을 잃은 부모들에게도. 힘들겠지만, 어서 평화의 시간이 찾아오기를, 영원 안에서 영혼은 육체와 시간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안식하고 있으니 부디 서로의 온기를 찾아 공명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