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신의 모호한 경계
영화 <루시>
뇌의 10%만 사용하고도 인류는 현재와 같은 문명의 발전을 이룩해냈다. 영화 <루시>는, 루시의 복부에 삽입된 약물로 인해 뇌의 사용량이 늘어가면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빠르게 보여준다.
일단, 뇌 사용량이 24%에 이르자 신체의 완벽한 통제가 가능해진다. 총알이 어깨에 박혀도, 마취하지 않은 복부를 칼로 그어도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과거의 촉감까지 생생히 기억해낸다. 엄마의 입술이 볼에 닿았던 느낌, 그때 집의 모양, 갓난 아이 때 겪었던 일들까지.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고, 그녀는 울면서 말한다.
40%에 이르자 나무를 타고 흐르는 에너지와 수맥이 보이고, 배운 적도 없으면서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말기 환자의 살 확률을 판단한다. 친구의 등허리만 짚고도 그녀가 어디가 안 좋은지, 어떤 치료법을 써야 하는지 단번에 알아낸다. 인터넷을 사용하여 정보를 습득하는 속도도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꺼번에 수백 개 이상의 창을 빛의 속도로 띄워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정보를 청소기처럼 흡수해낸다.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사람들의 전파도 읽어낸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컴퓨터의 전류 흐름도 조종할 수 있다. 뇌 사용량이 62%에 이르자 타인을 조종함이 가능해진다. 세관에서 자신을 향해 짖으며 다가오는 군견을 노려보기 1회로 통제하며, 상대방의 신체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버린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는 것만으로 상대의 기억을 볼 수 있고, 그 기억 속에 자리한 정보까지 캐어낼 수 있다.
뇌의 사용량이 늘어나는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다. 성장한 뇌 스스로가 자가 증식을 시작한 것이다. 루시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초능력 그 이상의 수준이지만 살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박사에게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달리던 자동차가 점점 속도를 높여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다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때, 그 자동차를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즉, ‘존재를 있게 해주는 것은 시간’이라는 하이데거식 고찰도 나온다.
그리고 뇌 사용량이 100%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사라져 버린다. 그녀를 찾는 사람들에게, 핸드폰의 문자메시지로 답한다. ‘나는 어디에나 있다’고.
오락적으로도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지만, 생각을 하게끔 하는 영화였다. 충분히 설득력도 있었다. 항간에는 ‘우리는 이미 뇌의 100%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SF 제작자들의 환상’이니 뭐니 하는 말도 있지만, 그들의 주장 또한 뇌를 골고루 사용한다는 것일 뿐 그것이 통합적으로 사용될 시의 가능성이나 잠재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루시>를 보면서 ‘정말 저럴 수도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 덕분에 재미가 더했던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장면, ‘나는 어디에나 있다’가 강렬하게 인상에 남는다. 어디에나 있다니. 신의 속성과 닮지 않았나. 뇌의 100%를 활용하게 되는 것은 영화상에선, 나와 세계를 내 뜻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아니 적어도 뤽 베송 감독이 생각하는) 신은 ‘뇌’가 확장한 존재로 지성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은 앎을 통해 인식을 확장해 간다. 그 확장된 인식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이 때 반드시 담보되어야 하는 것은 지성이다. 요즘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을 지성이라 하는데, 지성이란 정보의 축적과는 다른 질적인 차이가 있다. 많이 알기만 하는 것은 백과사전에 다름 아니다. 백과사전은 인터넷 혹은 도서관을 통하면 누구나 접근 가능하다. 하지만 지성은 본래적으로 가진 지적 욕구, 호기심,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나 스스로가 정립해놓은 삶의 철학 혹은 그것을 있게끔 하는 정신이다. 사전적 정의 또한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이니 말이다. 언제나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끊임없는 물음을 가지고 공부하며 애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정립하는 길이자 진짜 지성인의 태도라고 본다.
그리고 그 모든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 자신한다. 종교적 논쟁을 떠나, 기원전 1000년경부터 시작해 선대의 지혜와 삶과 죽음, 철학, 신, 인간, 영혼과 우주, 부활과 생명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책이지 않나. 무엇보다 신의 존재에 관한 가장 정묘한 역사적 증거(물) 그 자체이다. 진정한 지혜와 지성은 우주와 생명의 근원을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탐구해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 물음의 끝엔 반드시 신이 있다. 사족이지만, 설령 내가 하나님을 몰랐다 하더라도 신의 존재는 믿었을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우며 그 일들을 주관하는 신의 적정한 뜻이 있다고 믿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해보라. 이 모든 끔찍하고 비참한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미디어를 소비하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간다는 것을. (그것의 무한 반복을!) 개개인의 삶에 드리워지는 굴곡에 그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했을 때, ‘사는 게 다 그렇지’란 문장 하나에 모든 것을 압축하고 욱여넣을 수 밖에 없는 슬픔을. 신이 있기에 의미가 생겨나고 그 의미가 지성의 근간을 이루며 그것으로 생을 지탱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문득,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가 신에 대해 ‘완벽’하게 알게 되었을 때 뇌의 변화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뇌를 100% 사용하는 루시보다 더 영특해질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