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정공법
영화 <위플래쉬>
드럼에 미쳐있는 음대생 앤드류. 일류가 되는 것이 목표인 그는 오만하며 집념이 강하다. 그가 다니는 음대의 재즈 밴드를 지휘하는 플랫쳐 교수는 완벽한 연주를 위해 하루가 멀다고 연주자를 갈아 치운다. 앤드류는 우연한 기회에 플랫쳐 교수에게 발탁되어 재즈 밴드에 들어가지만, 연주한 지 5분도 안되어 날아오는 의자를 피하고 갖은 인격 모독과 욕설에 초토화가 된다. 의도한 것 같진 않으나 플랫쳐는 ‘밀당’을 잘하는, 심리전의 고수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며 상대를 달콤하게 칭찬하고 추켜세우다가 낯을 들 수 없는 모욕을 주고 재능과 재능에 대한 희망을 짓밟는다. 안타깝게도, 이에 앤드류는 ‘놀아난다’. 앞서도 말했지만 앤드류는 ‘미쳐’ 있는 학생이다. 그는 플랫쳐 교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드럼에 피가 튀도록 연습을 거듭한다. 그리고 등교하니, 신입 드러머가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고 앉았다. 피가 마르는 경쟁 상황 속에서 앤드류는 광기 어린 노력-자학에 가까운-을 자행한다. 그러나 두 미친 남자의 거센 기가 부딪쳐 폭발하여 결국 그는 밴드를 그만둔다. 순순히 떠나지 않는 앤드류다. 플랫쳐 교수를 고발해 그 역시 그만두게 만들어 버리는 곤조도 있다.
얼마 후 조용한 재즈 바에서 둘은 재회한다. 플랫쳐는 소탈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 일을 회고하다 내일 있을 공연에 드러머로 나와 줄 수 있느냐고 한다. 두근거리며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르지만- 플랫쳐가 일러준 연주곡 레퍼토리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곡들을 지휘하는 것이다. 자신만 모르는, 밴드 전체가 아는 곡이었다. 플랫쳐는 ‘네가 고발한 거 모를 줄 알았냐’며 사악한 미소를 날린다. 여기서 영화 후반, 관객의 숨소리도 들을 수 없는 명장면이 시작된다. 관객들의 야유를 받으며 실수를 연발하고 버벅대던 앤드류가, 공연의 흐름을 주도한 (그러니까 멋대로 드럼을 시작해 버린) 것이다. 교수는 당황하고, 앤드류는 여태껏 밤을 새우고 손에 붕대를 감으며 연습해온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흡사 자신만을 위한 솔로 무대에 선 것처럼. 드럼 연주는 끝날 줄은 모른다. 거꾸로 앤드류의 밀당에 놀아나게 된, 괴팍하게 얼굴을 일그린 플랫쳐도 연주에 빠져들다 드럼 파트가 끝날 즈음 힘차게 지휘를 시작한다.
이 영화는 노력이니 열정이니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성장통을 겪는 시답잖은 스무 살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두 광인의 기 싸움, 밀고 당기기, 통쾌한 복수극을 음악이라는 장르를 빌려 표현한 것이다. 앤드류는 아주 제대로 된 복수를 한다. 그 점이 가장 훌륭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최고의 드럼 연주)으로, 상대가 가장 갈급히 원하는 것(역시 최고의 드럼 연주)의 정 가운데를 꿰뚫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복수극이라면 서로가 윈윈이다. 특히 앤드류가 잃을 것은 하나도 없다. 복수를 위한 시간을 따로 내거나, 공을 들일 필요가 없이 그토록 좋아해 마지않는 드럼에 매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무수하게 겪는다. 복수하고 싶고, 날 괴롭힌 상대가 괴로워서 데굴데굴 구르는 꼴을 보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그래서 더 속이 상한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 따로 무언가를 투자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란 교훈을 얻었다. 왜냐면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상대에게 큰 영향을 못 미칠 것이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별 폼이 안 나기 때문이다.
만약 다윗이, 사울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했다면 어땠을까. 틈나는 대로 창을 던지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수소문해 쫓아다녔다면? 그냥 꼴사나웠을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복수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보고 직접 나서지 말라고 하시나 보다. 손에 피 묻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리하여 온통 더럽혀진 기분을 안은 채 소중한 하루를 낭비하지 말라고. 어차피 모든 일은 당신 뜻대로 되어가니까, 당신이 아끼는 자녀인 우리는 그런 험한 일에 직접 개입하지 말고 순둥순둥하게 우리 할 일에나 매진하라고 말이다. 본분. 본분에 충실했을 때 오는 결과는 그 자체로 훌륭한 복수가 된다. 나 자신이 얻는 게 더 많아진다. 그래서 내가 잘 되고, 내가 충만하여 생을 더 풍요롭게 음미하고 누리고, 복수의 대상을 생각할 여력 따위 없어진다면 얼마나 기쁠까.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다시 스틱을 쥐는 앤드류를 보는데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러다 문득, 일념으로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념으로 사는 사람에게선 감히 어떻게 해버릴 수도, 어쭙잖게 흉내 낼 수도 없는 깊고 뜨거운 아우라가 풍긴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교회에도, 말씀이 선포될 먼 개척의 땅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