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진단/2011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
성도들로부터 외면당하는 부활절연합예배
연합성의 본질 갈수록 상실
‘2011년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가 지난달 24일 오전 5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드려졌다. 한국교회의 큰 잔치인 부활절연합예배를 특정 교회에서 드린다는 것이 큰 문제일수는 없다. 그러나 갈수록 모이는 인원이 줄어들고, 성도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기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냐는 의견들이 있다.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치는 보여주기식 행사에 치중하다보니 점차 그 의미가 퇴색하게 됐고, 특정한 인사들로만 그 조직이 구성되고 유지되다보니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참석하는 성도수도 급감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같은 참석률 저조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모든 지역도 마찬가지다. 내년에는 또 어떤식으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 부활절연합예배를 주도하는 관계자들은 또 고민에 빠져야 한다.
예수의 고난과 죽임 당함, 그리고 부활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계획이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출발했기에 부활절은 기독교 최대의 축제가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일찍이 이 뜻을 깨달아 부활절을 연합하여 축하해 왔으며,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선교사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일제하에서도 교파별, 지역별 연합예배를 드리며 민족의 부활을 위해 기도했다.
1947년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서울 남산 광장에서 1만5천명의 기독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연합예배를 드린 이래로, 부활절 연합예배는 해방 이후 혼란기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희망을 담은 예배를 드렸고,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우리 만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4·19와 5·16, 70년대 유신 체제를 거치면서 한때 부활절연합예배가 중단되기도 하고, 보혁세력간 시국에 대한 교회의 입장 차이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한국교회는 1975년부터 여의도 광장에서 보수와 진보교단이 연합하여 예배를 드렸고, 1990년 이후로는 남북교회 간 부활절 축하 메시지가 오가기도 했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갈수록 모이는 인원이 감소했다. 그러다보니 장소를 좀 더 좁은 장충체육관으로 옮겼고 2002년 월드컵을 기회로 상암경기장으로 옮기더니 점점 그 장소가 작아져 올해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장소로 택했다. 박형성/편집국장
해설/2011년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예견된 한국교회의 실상
정신세계의 빈곤은 외형적인 치장에 몰두하듯이, 내용이 부실하면 외형에 집착하게 되고, 나타난 성과와 결과에 치우치다 보면 실적위주의 행사에만 관심이 증폭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진리를 운운했고, 내실을 기해야 된다고 천명했지만, 결과는 성장주의와 성과주의의 틀 속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는 본질의 목표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으며 목회라는 명분하에 사업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고, 급기야 개(個) 교회주의의 경쟁구도에 편승했다.
한국교회의 급격한 쇠퇴는 이미 예견된 일이지만 이제라도 올바른 진단과 함께 새로운 대안과 정비가 시급하다. 자성의 목소리는 높지만 실천의지가 약하고, 문제점은 찾았지만 대안이 미비하다. 개 교회주의는 목사 한 사람을 중심으로 편재된 행정체계에 따라 치리권, 강단권(설교), 재정권이 획일화되어있다. 목사는 당회장의 치리권과 제직회장의 재정권 그리고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강단의 설교권을 거머쥐고 행사한다. 이것은 마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에게 주어진 재산권, 재판권, 성경해석 권한의 삼권과도 일치한다.
개혁교회의 행정은 은사중심이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어도 안되며, 그 권한은 봉사를 기반으로 하는 직무에 불과한 것이다. 기독교는 수직적인 독재정치의 체제가 아니라 성도의 자율과 자원(自願)을 기초로 하는 수평적인 봉사체제이다. 교회는 목사를 위한 곳도 아니고 특수층의 전유물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한 진리의 전당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몇 사람의 특권층에 의해서 좌우되고, 성과위주의 행사와 실적에 도취되어 있다. 목사는 신(神)적 대리인을 자처하며 권세를 부리고, 교인들은 전도와 봉사라는 미명하에 혹사당하며 치열한 경쟁에 지쳐있다.
진리의 기반이 취약한 교회 일수록 과도한 행사와 실적에 집착한다. 교회는 문화센터로 전락하고, 모임을 위주로 한 사교의 장이 되어간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 하고,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직무에만 충실해야 한다. 선생은 맡은 학과에 충실하고 연구에 전념해서 학생들에게 양질의 내용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선생은 판사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니며 행사 진행자도 아니다. 사회가 급변하고, 시대의 문화가 다양해도 교회와 목사는 시대정신에 편승하면 안된다.
기독교는 진리의 본질에서 이탈하고 세력화되면 망한다는 것을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경고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기독교는 힘을 운집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구상하고, 숫자에 연연하고, 규모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국의 5000만 명 인구 중에서 1200만의 기독교인이 형성되었다. 기독교의 교세는 힘을 비축하게 되었고, 그것은 권력이 되고 권력의 남용은 부패를 초래하게 된다. 지난해에 한국의 기독교인의 숫자가 약400만 명이나 감소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로 보인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하나님은 찾을 수 없고, 성경책은 낭독하지만 그 내용은 모르고, 교회건물은 웅장하고 먹을 것은 풍요롭지만 영혼이 병들어 가는 교회를 찾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교회의 세대교체도 가관이다. 목사를 아들에게 세습하는 교회, 교회의 재산을 목사가 착취하는 교회, 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하듯이 연보를 횡령하거나 은닉하는 목사, 기업의 회장처럼 출판사, 신학교, 병원, 신문사 등의 이사장이 되어버린 기업형 목사. 이제는 더 이상의 부패나 행태를 소개할 것도 없다.
다만 진리를 위해서 일생을 수고하는 일부의 목사나 성도들이 분발해야 한다. 다수의 한국교회는 진리에 배불렀고, 재물에 취했으며, 직분이 명예와 감투로 전락했고, 목회는 목사의 생계와 사업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런데 중국과 인도 그리고 동남아의 교회들은 진리에 목말라하고 있으며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제라도 진리와 함께 하고자 하는 성도와 교회는 여기에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복음의 진로가 예루살렘에서 마케도냐와 터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을 거쳐 아시아로 향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기독교의 종주국이 되었다. 이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진리에 갈급한 영혼들을 찾아 나서며 그들에게 말씀을 증거해야 된다.
김승일 목사/미디어국장 |
“위기의 한국교회, 특단의 조치 필요” |
한기총 해체운동 본격 전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