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9-05 20:0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철학자 니체가 죽인 신(神) : 마땅히 죽어야 할 잡신(雜神)!


“원시적인 종족 집단 내부에서 (……) 현재의 세대는 앞선 세대, 특히 종족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세대에게 어떤 법률적인 의무를 지고 있음을 언제나 인정한다. (……) 여기에는 종족이 철저히 조상의 희생과 공헌에 의해서만 존속한다는 확신이.-희생과 공헌으로 이것을 그들의 조상에게 지불해야 한다는 확신이 지배한다 : 즉 이것은 부채를 승인한다는 것이며, 더구나 이 부채는 이러한 조상이 위력 있는 정령으로 계속 살아서 종족에게 새로운 이익과 가불(假拂)을 그들의 힘으로 끊임없이 보증한다는 사실에 의해 끊임없이 늘어간다. 조상이 무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희생(가장 조야하게 이해하자면 처음에는 음식물), 축제, 예배당, 예배, 특히 복종이었다.-왜냐하면 모든 관습은 조상들이 만든 작품으로 그들의 법령이자 명령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Friedrich  Nietzsche, 『즐거운 학문』, 니체전집12(KGW V 2), 안성찬·홍사현 옮김, 서울: 책세상, 2005, 200~201쪽) 

길게 인용한 니체의 설명은 종교의 기원이 조상들의 희생과 공헌에 대한 부채의식 곧 채무감에 있다고 밝히는 내용이다. 니체는 종교가 발생하는 기원을 원시 시대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를 통한 이성적 의사소통이 지배하던 시대 이전인 그 원시 시대에 대한 동경이 종교의 출발이다. 니체가 보기에 현대 인류는 선조들이 자신의 뿌리를 만들어주었다는 지대한 존경심을 종교 의식적으로 의무화하고 제도화했다. 이것이 종교의 기원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인류가 허구를 조작한 것이 결국 종교의 기원인 셈이다.
니체의 설명을 더 따라가 보자. 인류는 조상의 희생과 공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점은 공통점이다. 발틱 연안의 어떤 종족은 죽은 조상의 묘를 집안에 만들어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을 정도다. 인디언 어떤 부족은 위대한 추장의 시신은 버리지 않고 극대의 존경 표시로 자신의 몸 안으로 삼키는 의식도 있었다. 이러한 의식(儀式)에 자리 잡고 있는 심리적 상태를 니체는 바로 ‘부채의식’이라고 본다. 부채에 대한 채무감이 클수록 조상에 대한 존경심은 죽은 조상을 항상 자기 삶을 지배하는 ‘정령(精靈)’이 되어 주위에서 지켜보는 존재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 정령을 의식하면서 죽은 조상은 점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간다. 왜냐하면 채무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뭔가를 보상하지 않으면 불행과 비극이 닥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상들은 무상(無償)으로 그렇게 헌신과 희생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처음에는 음식물 정도를 바치는 것에서 기념 축제에서 예배당으로 예배 의식으로 발전한다. 니체가 보는 서양 종교 특히 유럽 기독교 역사의 본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조상에 대한 채권-채무자 관계다. 이러한 의식이 종교적으로 교리화되고 법령이 되면 일상사를 모두 통제하는 허구적 조작이지만 몸과 영혼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지배수단이 된다. 니체는 바로 이러한 종교의 정점에 서양 기독교가 있다고 보며 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자기 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로 삼고 있다.
특히 니체는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 자칭했던 간교한 직업적 종교꾼들인 사제(司祭)에 대한 강한 분노를 쏟아놓는다. 신의 대변자로 자청하면서 건강했던 인류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질식시킨 사악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에 모여서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라도 자유롭지 못하게 가장 사악한 악법인 교회법을 만들어서 유럽을 천 년 이상 병들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니체가 파악한 기독교의 본질이 비록 비성경적인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니체가 죽인 신(神)은 서양을 너무도 병들게 한 정말로 마땅히 죽여야 할 우상이며 잡신이었다.
이러한 일이 어찌 서양뿐이겠는가? 작금에 일어나는 한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현장을 보면 그들이 만든 신도 니체의 칼날에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너무도 부패하여 니체가 그 우상과 잡신을 처리하기 전에 썩어서 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훨씬 더 빠를 수도 있을 지경이다. ‘한국 교회가 중세 로마가톨릭보다 더 부패했다’는 기독교 원로의 지적이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니체의 말로 권한다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한국 교회에 가는 것은 신중하라!’ 니체의 분노를 체감하면서 니체가 그토록 미워했던 인물 사도 바울을 통해 아테네 아고라 광장에서 선포된 성경으로 들어가 보자.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 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4~29).

성경에서 밝힌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만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될 때 인간 매개자는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성경을 모르면 속는다. 니체의 인생 여정을 잠시 들여다보자. 비록 루터교의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그는 성경진리에 투철하도록 양육 받기보다 엄격한 종교적 굴레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성경을 인간들의 문서 편집으로 보는 자들을 만났다. 니체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그의 ‘운명’이었으며 이 운명에 충실하고자 니체는 사정없이 조작된 서양의 신을 파괴했다. 니체가 파괴한 잡신들은 2천 년 이상 서구 역사를 지배해 온 성경의 신과는 무관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신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조작된 온갖 잡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잡신들을 청소하는 니체의 공로에 박수를 보내고자 함은 아니다. 하지만 니체 자신이 말하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을 그의 서양 기독교 비판에 가져가 보면, 니체의 자기 사랑의 운명은 잡신들을 청소하는 데서 약간의 위로를 얻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어떤 대안으로 그 과제를 마무리했는지 그리 투명하지 않다. 니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철저히 내면화된 인간이 만드는 신이다. 그러나 니체의 사후 니체가 꿈꾸는 그 신은 결코 도래하지 않았으며 도래할 여지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르는 참상 속에서 니체는 대안으로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소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성경에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은 니체의 상식으로 파악되는 조상신이나 우상이나 허구적 조작이 아니다. 서양 기독교는 니체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서양 기독교에 의존해서 살았던 한국 기독교도 퇴락하고 있다. 다행이다. 왜냐하면 서양이 그리고 한국이 교회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니체가 벌인 서양 기독교의 우상에 대한 전면전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서구처럼 몰락할 것인지 ‘오직 성경권위’의 은총 속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지 그 한가운데 말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통렬한 꾸짖음이자 당부
즐거움과 슬픔의 교향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