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표트르 이후 러시아: 허망(虛妄)으로 끝난‘제3의 로마’
38:2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곧 곡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4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마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5 그들과 함께 한 방패와 투구를 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6 고멜과 그 모든 떼와 북쪽 끝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겔 38:2~6)
이미 망해버린 동·서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황제(차르) 표트르 1세(Pyotr Alexeyevich Romanov, 1672~1725)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천도를 단행했다. 그리고 그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그의 왕비 예카테리나(1684~1727)가 ‘여제(女帝)’되어 마무리하기도 했다. 근대의 러시아를 건립하는데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몫은 상당하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성경에 근거한 동쪽 경계의 야벳 국가 창립의 의미를 짚어본 바 있다. 창세기 9장 2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야벳 족속의 창대’를 언약한 바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중세의 말기부터 잠시 다루어보았다. 개혁파 신학 역사의 원천인 1517년 종교개혁 무렵을 중심으로 동북쪽 야벳 족의 후예인 러시아 제국이 성립하는 과정은 이후 동방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지혜(성경의 절대적 진리)의 전파 역사와 매우 흥미로운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한 야벳 족은 지구의 동쪽 끝에서 다시 한번 ‘창대’한 문화를 이룩한 것으로 보이는 나라가 ‘러시아’다. 19세기와 20세기 유럽의 근대와 현대 역사를 말하면서 반드시 등장하고 그 상당한 지배권력의 영향력을 할애할수 밖에 없는 나라가 한때 ‘제3의 로마’로 자칭했던 러시아다. 인종으로 보면 야벳족이며 언어로 봐도 야벳의 후손인 인도유럽어족이며 종교로 보아도 동로마제국의 정교회를 계승한 명백한 야벳의 후손이다. 군사적 막강함으로 보아도 야벳 인종의 혼혈로 보이는 미합중국처럼 강한 나라이며, 인종으로 보아도 (일부 셈족을 포함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유럽 인종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러시아는 현대사에서 ‘냉전(冷戰)’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이지만, (행 1:8에 근거한 동방에서 서방으로 그리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가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속한 ‘지혜’의 대이동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러시아 제국의 발흥과 몰락 그리고 또 다른 방식의 지배체제였던 ‘공산주의’의 러시아는 우리가 오늘 이곳 극동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절대진리 성경의 대이동 역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을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앞서 인용한 본문에는 여호와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신 예언이 등장한다. 주전 586년 남유다 패망 직전에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야벳 후손의 징벌을 예언하신다. 즉 남유다에 대한 회복의 징조를 보여주시는 데 바로 야벳 후손에 대한 진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2절의 마곡과 메섹과 두발은 야벳의 아들들이며, 6절의 고멜도 야벳의 후손이며 도갈마는 고멜의 아들로서 야벳의 후손이다. 유다 백성의 회복이 페르시아의 제왕 ‘고레스’부터 시작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역사는 남쪽 유다 회복 그리고 이후 페르시아 제국과 헬라 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야벳 족속은 점차 퇴락할 것이며 바로 그 사건이 유다 자손을 통해 오실 메시아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회복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큰 흐름 속에서 ‘제3의 로마 제국’을 꿈꾸었던 러시아 제국의 과거 역사는 야벳족의 창대함과 그리고 셈족 속에 거함(창 9:27) 또한 동시에 에스겔에게 예언한바 그 몰락까지 포괄적으로 짚어 봐야 할 역사로 보인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선 표트르 대제 이후의 러시아의 근대 역사와 현대 역사를 약술(略述)하면서 어떻게 극동의 셈족에게 영원한 지혜(소피아)의 말씀이 대이동을 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상고해 보려고 한다.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상트페테르부르그 시대는 국교인 정교회(正敎會)마저 국가 통치의 수단으로 만들면서 향후 역사가 이어진다. 러시아 역사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던 이 시대는 확장된 제국의 영토가 남쪽으로는 흑해 연안과 크림 반도까지, 그리고 러시아와 아시아가 접하는 초원 스텝 지역에서는 우랄 산맥을 넘어서 카스피해 연안까지 확장되었다. 그야말로 제국이라고 칭할 만한 영토를 얻었으며 창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령지에는 농노제를 확대하여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통치 세력들의 부를 축적하며 마음껏 누렸다. 그리고 인구 분포로 볼 때 대다수가 농노였던 백성들에게 제국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몫은 정교회 수사들이 수행했다. 농민반란이 속출한 것은 당연하며 후에 1917년 공산당혁명 당시 민중의 봉기는 혁명의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전제군주제를 강화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만들면서 이 제국은 귀족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교육 분야에도 진전을 이룬다. 신학교에서는 차세대 주교를 양육해서 국가통치에 활용하고 또한 러시아 자국 대학에서 유수한 많은 학자들과 작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을 배출한다. 이로써 러시아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서유럽의 강대국과 같은 반열로 성숙하고 있다는 자신감은 점차로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비록 잠시 19세기 초에 나폴레옹의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결국 나폴레옹 제국의 침략을 저지하고 대승을 이끌어 전승국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이로써 군사적으로도 명실상부 ‘제국’임을 자부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렇게 팽창한 러시아 제국 내부에는 심각한 문제가 산적했다. 경제적 후진성, 귀족특혜에 대한 반발, 식민전쟁으로 인한 빈궁 등이 또 다른 혁명의 뇌관(雷管)이 되고 있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차별이 심화되었다. 정교회 신자는 다른 종파에 비해 어느 정도 특권이 있었으며, 여타 기독교인은 이슬람보다는 높은 위치에 그리고 유대교와 이슬람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이렇게 불안한 제국은 차르 체제 말기에 이르러 러일전쟁(1904∼05)을 계기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과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함으로써 특히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집단적 반발을 야기했다. 패전으로 인해 점점 악화하는 경제상황은 급기야 제국에 대한 저항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차르는 발포를 명령하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진다. 노동자의 총파업이 뒤따르고, 농민들은 반란에 가세하였으며 그리고 군인들의 폭동도 연이어 발생했다. 러시아 제국은 몰락에 직면해서 시위대와 협상 의사를 밝혔지만, 시위자들이 요구하는 바-농민들에 대한 땅 무상 분배, 정치범 석방, 유대인과 비국교도에 대한 동등권 부여, 폴란드 자치권 인정-를 듣고는 거절했다. 그리고 차르는 점점 과거 제국시대의 정치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런데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적대국인 세르비아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다. 세르비아를 포기한다는 것은 발칸 반도 지배권을 잃게 되고 나아가 러시아는 독일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결국 제정 러시아의 붕괴를 초래한다. 러시아는 이 전투에서 15만여 명에 이르는 전투 인력을 포로로 바치는 꼴이 되고 총 100만여 명이 희생을 당하는 패전국이 된다. 병력 동원으로 더욱 피폐해진 국가 경제는 총체적 혼란에 빠졌으며 연이은 군중들의 파업과 시위, 군대의 폭동은 제국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했다. 결국 국군최고통제권마저 상실한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프스코프에서 퇴위를 선택함으로써 제3의 로마를 꿈꿨던 천년의 왕국 러시아 제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현대 국가에서 또다시 ‘러시아의 창대함’을 유지하는 체제로 이어진다.
<168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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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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