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가 본 현대인의 ‘자유’: ‘야만’으로 향하는 여행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285번 잠언)에서 “우리 운명은 안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야만으로 끝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광고 카피에 이런 것이 있다. ‘여러분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요? 여행입니다.’ 니체의 말과 광고 문구를 이어보면 여행은 야만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다. 일이나 유람(遊覽)하기 위해 다른 곳 다른 나라로 가는 여행은 자유의 상징처럼 보이며 현대인의 돈벌이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연차휴가를 여행을 위해 모으는 것은 이제는 평범한 일상사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다. 이쯤에서 자유를 위한 여행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평가한다. ‘휴가 다녀와서 더 피곤해!’라고. 그러면 니체가 기다렸듯이 이렇게 말한다. 신체를 “돌이 굴러가듯 기계적인 성격의 우둔함에 따라”(앞의 책, 283번 잠언) 굴렸으니 자유 여행은커녕 방전(放電)의 지친 여행이 될밖에!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 니체는 ‘정신의 자유’를 일깨워주고자 한다.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원리를 힘의 발산과 확대로 본다는 의미에서 ‘권력 의지’는 니체 사유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정신의 자유 혹은 자유의 정신 또한 권력의지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권력의지의 논리에 의하면 자유의 출발은 존재하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해체하고 전복(顚覆)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유를 향한 시도는 기존에 보존했던 자유를 파괴해야 하는 아픔을 반드시 겪는다. 새롭게 경험한 자유라는 것이 당장 부정당해야 하는 운명에 내몰리는 신세가 반복되는 그야말로 무방비의 해체에 전면적으로 노출된다. 진정한 자유의 정신을 찾다가 오히려 모든 자유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방전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니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해체와 파괴의 사건들이 인간의 ‘자유정신’은 결코 훼손할 수 없다고 본다. 자유정신의 가능성은 고정된 자유의 집착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기존 자유의 보호막을 완전히 걷어 버린다는 것이 여름날 뙤약볕에 타버린 살갗의 아픔처럼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오히려 자유정신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운 피부를 위해 벗겨질 껍질일 수 있다. 신체적 활동의 여유로움과 피곤함의 차원을 넘어서는 ‘정신의 자유로움’은 ‘자유로움의 정신’이기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움의 정신은 전통적으로 억압과 굴종을 자유라고 속였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니체는 서양 기독교 문화를 제시한다. 기독교의 조작된 거짓 가치가 억압과 착취의 발톱을 숨기고 그것을 ‘자유’라고 속였다. 그래서 거짓 자유가 인간의 정신세계를 너무 지치게 만들어 정신활동의 마지막 기운까지 짓밟아 왔기 때문이다.
니체는 여기서 정신의 자유로움을 위해 ‘자유로움이라는 정신’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자기 철학의 사명으로 삼기도 한다. 다른 방향으로 말하면 ‘자유로움’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어떠한 정신도 자유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모든 정신이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온몸에 남은 생존적 몸부림의 상흔(傷痕)은 단순한 신체적 훼손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의지의 분명한 확증이 된다. 그래서 니체가 말하는 ‘자유를 위한 여행’은 오히려 피곤함의 흔적을 안고 오는 것일 수도 있으며 아픔의 흔적도 반드시 동반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을 더욱 견고하게 해본다면, 아픔의 흔적들이 누적되는 것은 ‘자유의 정신’에 대한 확신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신체에 대한 억압을 더욱 강화한다고 해서 그것이 삶의 의지 자체나 정신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 상황이 자유정신을 향한 의지를 오히려 더 강하게 몰아붙일 수도 있다. 니체가 말하는 의지는 항상 힘의 상승과 강화를 향한 의지가 뒷받침하고 있다. 의지의 상승이 자기 힘을 강화하는 구조가 되려면 최선이건 최악이건 모두 필연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최악 속에 최선이, 반대로 최선 속에 최악이 가능해야 한다. 이성 속에 감정이 감정 속에 이성이 공존해야만 한다. 이러한 두 극단이 서로 상호침투하는 상황 속에서 바로 ‘진정한 자유는 여행이다’라는 광고가 허구가 아니라 니체적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니체는 이러한 자유의 정신을 구상하여 동시에 정신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명제를 ‘진리명제’로 확정 짓고자 한다. 니체는 신체의 모든 상흔을 안고 무한한 자유의 확장을 위해 온몸을 던지는 정신을(『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 I,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큰 이성’이라고 한다. 분열과 혼돈 속에서 통일과 질서에 대한 가능성을 ‘직감’하는 신체의 무한한 가능성이 니체식의 ‘큰 이성’이다. 니체가 진단한 야만으로 향한다는 현대 서구인의 자유, 그것은 결국 니체의 우려대로 야만으로 흘러갔다. 니체 사후의 유럽 역사는 문명사회라고 자부했던 유럽인들과 유럽 문화가 하나님의 이름까지 도용하면서 ‘야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역사가 되었다. 많은 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야만의 소굴로 몰아갔다.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을 니체가 보았다면 니체는 아마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언했던 유럽인의 자유가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야만’으로 확증된 사실이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통찰이 다른 철학자들보다 뛰어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자유’에 대해서도 니체의 통찰은 놀라운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철학적 통찰이 곧바로 그의 말대로 ‘자유’을 보장할 수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상대적인 존재인 인간끼리 공감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니체의 고민을 그가 설정해 놓은 사유의 극단까지 공감하면서 그와 함께 그 지점으로 몰려갈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인류의 공감으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합의할 수 없는 그래서 우리의 사유를 넘어서 분명히 존재하는 진정한 자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이 바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곳이다. 바울 사도는 분명 그곳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았던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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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군자는 어짊(사랑)을 오래도록 즐기고 실천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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