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9-03-30 08:2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말씀의 운동력에 의한 취리히 종교개혁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로고스의 운동력과 소피아의 대이동
열일곱. 말씀의 운동력에 의한 취리히 종교개혁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聖山)이라 일컫게 되리라(슥 8:3).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첫 번 인용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향후 예루살렘은 이방인도 함께하는 ‘진리의 성읍’ 된다는 예언의 말씀이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유대인의 포로 생활은 결국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와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모든 나라들에게 개방되는 사건으로 결론을 맞이했으며, 그 결과,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만 불렀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자유롭게 마음 놓고 부르고 있다. 두 번째 인용은, 하나님의 집은 예루살렘 건물로서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부터 땅끝까지 세워지는(행 1:9)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신령한 성전이 곧 하나님의 교회이며, 교회는 바로 성경진리가 기둥이 되며 토대가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두 인용을 통해 1517년 10월 31일 시작된 유럽 종교개혁의 본질이 ‘말씀운동’(히 4:12)에 의한 성경권위 회복 운동이었음을 기억하면서, 독일과 함께 당대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말씀운동, 성경적 소피아의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1517년 10월 31일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던 삼 년 차 강사 루터는 95개 반박문을 로마 교황에게 공개 토론으로 제안했다. 성경권위와 예정론에 심취해 중세의 인본주의적인 스콜라 신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수업의 연장선에서 루터는 보란 듯이 반박문을 교회 대문에 못질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운동하여(히 4:12) 루터로 하여금 일어나도록 한 유럽 종교개혁의 출발 사건이다. 인간 이성의 부분 타락을 주장하는 당대 유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에 맞서는 ‘노예의지론’도 성경권위와 예정론에 대한 확신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루터는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신성모독’ 개념으로 판단하고 인간 의지는 ‘노예의지’로 규정했다. 중세의 인간 중심적 소피아(지혜)가 성경중심적 소피아로 변혁된 것은 유럽의 향후 지적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이러한 독일 중북부 작센주(州)에서 일어나고 있던 ‘말씀운동’의 역사적 사건을 우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도 만날 수 있다. 루터와는 거의 무관하게 취리히에서는 말씀의 운동력이 개혁자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를 감동하여 개혁운동에 앞장서도록 했다. 로마 교황에 대항해 ‘은총으로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면서 취리히 참사회 성당의 설교자가 되었다. 루터보다 3년 앞에서 그의 동료 성직자들은 500년 로마 가톨릭 금기를 깨고 결혼을 단행했으며 이는 성경적으로 너무나 마땅한 처사임을 츠빙글리는 적극 옹호했다. 취리히에서 일어났던 이 종교개혁 운동가들의 사상은 현재 고유명사처럼 사용되는 ‘개혁주의’의 태동이기도 하다. 개혁주의는 독일 종교개혁의 후예인 루터파 교회와 구분에서 사용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상 ‘칼빈주의=개혁주의’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개념으로 정착되기 전 이미 개혁파 교회의 사상을 규정하는 ‘개혁주의’라는 개념이 먼저 취리히에 있었다.

루터파와는 성상(聖像)이나 교회법 그리고 성찬식에서 다른 입장을 취하는 취리히 개혁주의는 1524년에 취리히 시의회가 성상을 금지했고 1525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missa)를 그 도시에서 폐지했다. 그리고 성상들을 보호하려고 성상반대자들을 축출하는 루터의 입장에 대해 취리히는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루터에게 성상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위해, 목격을 위해, 기억을 위해, 표시를 위해’(418쪽 참조)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성상은 감각을 유혹하기 때문에 반대했으며 음악 전문가이기도 했지만 음악도 우상숭배의 일종으로 보고 교회에서 금지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가장 큰 불일치는 성찬식 문제였다. 루터는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라는 명제를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반해 츠빙글리는 요한복음 6:36절(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에 근거하여 루터가 주장하는 성찬식은 마치 이방종교의 부적(符籍)과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성찬식은 단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가 신앙을 고백하는 방법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나게 하는 방법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세례식도 성도를 환영하는 절차일 뿐이다.(420쪽 참조) 이러한 생각을 죽는 날까지 루터와 타협하지 않은 츠빙글리는 재세례파(Anabaptists)의 세례의식화에도 경악했으며 그들 중 4명을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급진적 재세례파들 일부는 성경을 ‘종이교황’이라고 폄하하면서 신과의 직접 소통을 가르쳤다. 츠빙글리는 이러한 주장과도 타협할 수 없었다. 성경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의 영적 전쟁 상황에서 로마 교황을 옹호하는 합스부르크 왕가 연합군과의 전쟁에 종군목사로 참전하여 처참하게 순교하기까지 츠빙글리를 진리투쟁으로 몰아간 힘은 바로 진리에 대한 그의 확신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 시기에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을 현재의 도덕적이며 사회윤리적 기준으로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모든 사건 발생과 전개와 결말들이 모두 성경권위의 회복을 주도한 하나님의 소피아, 말씀의 운동력이었다는 점이다.

취리히 종교개혁은 ‘정부주도형 종교개혁’을 가속화시켰다. 이들은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재세례파와 자신들을 구별하면서 취리히 시의회와 츠빙글리가 주도하는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서유럽의 많은 군주들과 행정 관료들 그리고 신학적 지식인들이 이 정부주도형 개혁주의 운동에 많이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취리히 종교개혁이다. 그래서 이 종교개혁을 ‘마기스트리(magistri) 프로테스탄트 운동’이라고도 한다.(421쪽 참조) 중세의 암흑기를 성경권위로 조명하자 모든 어두움과 거짓들이 폭로되는 과정에서 서유럽 사회에 성경권위가 확산하는 데 전기(轉機)를 마련해준 것이 말씀운동 취리히 종교개혁이었다. 마기스트리의 종교개혁 참여는 독일은 물론 중앙 유럽 그리고 스칸디나비아반도 그리고 잉글랜드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에 의해 화형대에 이슬로 사라진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대명사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과 그의 신약성경 번역은 흠정역(The Authorized of King James, 1611)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성경권위가 앞섰던 취리히 종교개혁은 향후 서유럽 개혁주의 발전과 성도 개인의 자유 신장 그리고 사회변혁과 발전에 긴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174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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