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서른다섯. 18-19세기 유럽 기독교의 변화와 변질 1 : 여성운동과 무신론 운동
운송 수단과 통신 기술의 발전, 값싼 인쇄술의 비약적 확산은 성경 중심의 유럽 개신교 세계에 급속한 성경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 영어권의 경우 1808년부터 1901년까지 한 세기 동안 보급된 성경 수는 4천 6백만 권이나 되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보다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 성물(聖物)처럼 여기는 경향도 농후했다. 금박 물린 고급 양장 표지와 성화(聖畵)로 둔갑하기 쉬운 삽화나 화보가 성경 내용을 압도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의 확산은 특히 로마 가톨릭의 여성 지도자의 확산과 성장처럼 개신교에도 여성 지도자들의 급부상을 촉발했다. 1853년 미국 뉴욕 주에서 앤트워네트 브라운(Antoimette Brown)이라는 여성이 현대 기독교 역사 최초로 여성 목사로서 안수를 받기도 했다.(156) 이들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노예해방 운동이나 음주문제 등 사회적 개혁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개선과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조세핀 버틀러(Josephine Butler)와 같은 복음주의 신앙인들이 최초로 매춘 여성들의 인간적 권리와 성차별 문제에 대한 항거를 하고 나아가 매춘 여성들의 복지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사회적 캠페인도 전개하였다. 그뿐 아니라 기혼 여성들을 상대로 성병(性病)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공개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사회적 문제에 깊게 관여할 수 있는 동력은 분명 모든 인간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종교개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동력은 다시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성경권위’로 돌아오지 않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모든 인간이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개인주의의 극단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가 시민정부의 이름으로 등장하여 결국 시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치는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유럽 기독교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 측면에서 성경권위로 돌아오지 못한 예는 종교개혁의 출발지였던 독일 중북부의 쇠퇴 역사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성경권위와 점점 멀어지면서 대학은 성경진리를 배척하는 기관이 되고 개인의 신앙은 자신의 감정에 호소하는 그야말로 세속화의 길을 가게 된 결과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主犯)이 된, 세속화한 너무도 체계적으로 세속화한 세속도시 베를린대학교를 중심으로 퇴락하는 독일 기독교를 주목하게 된다. 베를린대학의 창안은 빌헬름 폰 훔볼트([Karl] Wilhelm, Freiherr von Humboldt 1767-1835, 언어학자·철학자·외교관·교육개혁가)이다. 그는 베를린대학교를 당시 나폴레옹 군대에 성공적으로 대항했던 호엔촐레른 왕조(Hohenzollern dynasty)인 프러시아 황제의 후원으로 건립했다. 루터교 전통의 대학을 구상했으나 당시 황제는 개신교를 학문의 우위에 두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신학을 새롭게 시작하는 대학의 기초로 두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생각에 동조한 철학자이자 신학자가 바로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였다. 그는 신학자였지만 대학 교육에서 신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신학은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목회자를 배출하는 실용적 분야로 간주했다.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판단은 이후 독일이 세계대전에서 기독교를 얼마나 철저하게 전쟁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는지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세워진 베를린대학교는 ‘성경권위’를 점점 뒷전으로 하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계몽주의를 대학 교육의 이념적 원천으로 삼았다. 특히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 신앙의 원천인 ‘계시’를 부정하고 인간의 ‘도덕적 양심’이 신앙의 바탕이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뿌리내리고자 했으며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나 감정이 기독교의 원천이라고 역설했다.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발상으로 반성경적인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몰입한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이성주의를 느낌과 감정으로 보완하면서 인류는 누구나 절대자를 경험할 수 있는 무한한 신성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 감정’의 우월성은 성경권위를 부정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으로서 예수의 의식 세계가 탁월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가령 슐라이어마허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의식은 그리스도에 기인한다. 그분은 자신 안에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신다”(160)라고 할 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인 신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 예수의 의식 세계가 얼마나 탁월했는지 그리고 모든 인간도 예수처럼 내면에 탁월한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의식활동을 기독교 신앙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사상은 그의 동료였으며 독일 관념론을 완성했다고 하는 변증법적 역사관을 체계화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게 오면 더욱 급진화한다. 헤겔에 따르면 “세상 없이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161) 헤겔에게 종교는 단지 고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 부족한 인간들에게 더 나은 신의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매체에 불과하다. 헤겔에 오면 신학은 곧 성경권위의 완전한 부정을 의미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전통 기독교는 폐기 대상이 된다. 이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자가 ‘청년 헤겔학파’의 일원이었던 포이에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이다. 그는 모든 허구적 지식의 원천이 바로 기독교라고 보았다. 인간 이상의 신은 존재할 수 없다. 신학의 본질은 바로 인간학이라는 그의 명제는 종교개혁의 출발지가 종교개혁의 매장지(埋葬地)가 되고 ‘신의 죽음’이 왜 독일에서 반포되어야 하는지 그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인간이 가진 가치 이상의 가치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162) 인간의 가치에 위배되는 모든 신은 죽여야만 당위성을 만들어주는 전통이 현대 독일대학 전통의 뿌리가 되고 있었다.
<210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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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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