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그대는 사람을 얻었는가
子游爲武城宰 子曰女得人焉爾乎
자유위무성재 자왈여득인언이호
曰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於偃之室也
왈유담대멸명자 행불유경 비공사 미상지어언지실야
『논어』 「옹야」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자유가 무성의 읍재(邑宰)가 되었다. 공자가 “너는 사람을 얻었는가”라고 물었다.
자유가 대답했다.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닐 때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아직까지 언(나)의 방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자유’는 공자의 제자이고, ‘무성’은 노나라 도성 근처의 읍이다. ‘여(女)’는 ‘汝(여)’와 통용되며 ‘너’를 뜻한다. ‘언이호(焉爾乎)’는 강조의 어조사로 ‘진정 ~한가’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자 공자가 그곳에 근무하면서 바른 사람을 얻었는지를 물은 것이다. 공자는 아마도 이 물음을 통해서 자유가 사람을 바르게 보고 등용하는 공부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자유(子游)는 한 사람을 얻었다고 대답했다. 그에 따르면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이었다. 담대는 성이고 멸명은 이름이다. 자는 자우(子羽)다. 경(徑)은 길이 좁으면서 빨리 이를 수 있는 길을 말한다(徑, 路之小而捷者). 불유경(不由徑), 즉 활동할 때 빠른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빨리 성공하려는 생각이 없음을 암시한다. ‘공사(公事)’는 음사(飮射)례의 행사나 공부(讀法)의 경우 등을 가리킨다. 자유의 방에 들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대쪽같이 간결한(簡, 간) 사람임을 말해 준다. 자유의 말을 종합하면 담대멸명은 결코 자신의 의지를 굽혀서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면서 자신의 사욕을 추구하는 인물이 아니다.
공자가 ‘사람을 얻었는가(得人, 득인)’라고 물은 것은 정치의 핵심이 바른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음을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이에 대해 자유는 담대멸명이라는 사람을 하나 얻었다고 답하였다. 그가 담대멸명을 추천한 이유는 그의 공명정대함이었다. 양씨(楊氏)는 자유와 같은 공자의 문하생이 아니면 공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자신을 지키기를 담대멸명처럼 하고 사람을 등용함을 자유처럼 한다면 사악함이나 수치를 당하는 데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와 담대멸명 사이의 관계가 시사해주는 바는 상당하다.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서로의 관계가 있다. 이것을 자본주의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거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서의 거래에는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마음이 근본을 이루어야 한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들 사이에서 서로 해 준 것을 핑계로 사랑의 빚 갚기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관계에는 진리를 품고 서로 도우며 이웃이 되고, 서로의 직무를 정직과 성실로써 담당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각자가 부족한 사람들이어서 사랑의 빚 갚기가 온전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사랑의 빚에 관한 말씀이 그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서로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갚아야 할 빚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빚을 갚는 사람이다. 사랑의 빚으로 사람을 쓰고 사랑의 빚으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 빚을 갚아서 사랑의 빚을 갚아나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들 사이에서의 관계가 사랑의 빚으로 말미암고 사랑의 빚을 서로 갚는 것으로 이어지게 하자. 나아가서 우리가 이 빚을 갚을 능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실천하자.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본받아 사랑의 빚 갚기 운동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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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맹지반의 지도자상 |
반기독교적 유물론의 원조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