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1-10-20 11:2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서른여덟. 18-19세기 아프리카의 복음 전파와 아시아로 향하는 복음 진리


18-19세기 영미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든다면 아마 노예제의 철폐일 것이다. 15세기 말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그들을 상거래하면서 시작한 노예무역은 1865년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하여 남부의 4백만 명 노예를 해방할 때까지(289) 4백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노예무역의 정당함과 노예무역의 부당함 모두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노예무역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으로 여기는 근거는 창세기 9장 26-27절이다. 노아의 아들 함은 셈과 야벳의 종이 된다는 내용이다. 유대교, 이슬람교, 로마 가톨릭, 개신교 모두 창세기 9장에 대한 같은 해석을 통해 경쟁적으로 노예무역에 열을 올렸다. 아프리카인들이 4백여 년 동안 들판의 짐승처럼 취급받으면서 세계 종교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건이 바로 노예무역이었다.

17세기 말(1688년) 종교적 관용정책을 강조하는 네덜란드 퀘이커(Quaker)들의 노예제도 금지 청원을 비롯해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노예무역 금지, 노예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친노예론자들이 성경에서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찾은 것처럼 노예제 반대론자 개신교들도 성경에 나타난 평등과 자유에서 노예제 철폐의 근거를 찾았다. 노예제도 자체의 폐지는 영국 의회에서 처리했다. 1833년 노예제도 완전 폐지가 영국 의회를 통과했다.(223) 이러한 노예제 철폐에 대한 투쟁은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과 급진적인 계몽주의자들이 함께 연합하여 세계인의 인권 투쟁사에 길이 남을 사건을 만들었다. 영국 의회가 노예제를 근본적으로 철폐한 것에 대하여 “영국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행동 중 손에 꼽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일”(224)로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노예해방의 여파는 이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노예제도 문제로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미국의 가장 큰 교단이었던 감리교와 침례교 교단 내부에서도 의견이 양분되어 교단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 4년 동안 62만 명의 희생자를 대가로 지불한 후 노예제도는 마땅히 철폐해야 한다는 사실이 미국 헌법 제13조에 명시된다. 

노예해방의 대사건은 아프리카인들에게 기독교를 확산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미 미국 북부에 노예 신분으로 와서 기독교 신자가 된 아프리카 신도도 있었지만 노예제 해방과 함께 아프리카 본토와 미주에서 함께 신자 수 증가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북부에 비해 노예제가 아직 남아있던 남부에서는 노예해방을 부르짖는 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신자들의 교회가 동시에 자신의 인권을 주장하는 집결지가 되기도 했다. 아프리카 신자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므로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같은 신비한 경험과 체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개인적 예언이나 신령한 환상을 보는 것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병을 낫게 하는 체험인 신유(神癒) 은사의 집회가 아프리카 본토에도 성행하여 (당시 에티오피아 교회와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하나님 말씀 중심의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예제 해방이 영미에서 진행되는 동안 19세기 중반 중국 청나라 왕조가 영국과 치른 전쟁(아편전쟁)에서 패한 결과 1842년 채결된 ‘난징조약’과 외세에 의한 ‘태평천국의 난’ 진압으로 영국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자유롭게 선교 사역을 할 수 있었다.(270) 이 무렵 미국의 페리(Perry) 제독은 일본 문화를 강압적으로 개방했다.(1853년) 그리고 엄청난 양의 일본어 번역 성경이 일본에 보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는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교육과 문화의 근대화는 서구의 방식을 따라갔지만 성경에 바탕을 둔 기독교 문화가 꽃피지는 않았다. 기독교의 바른 진리가 전파되고 성경진리로 뿌리가 확고해지고 신앙의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속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대한민국의 복음 전파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확장의 역사였다. 영국의 기독교 역사가 맥클로흐는 한국에서 성장한 기독교 진리의 전파에 대해 “종교개혁 이후 전 세계로 퍼진 기독교 확장의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274)라고 평가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늦게 기독교를 접한 나라인데 결과적으로 어떤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교회 성장의 역사가 일어난 경우가 바로 한국 교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보다 먼저 전해진 가톨릭이 조선 왕조의 박해로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내면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현저한 퇴보를 걷고 있을 무렵, 1870년대 조선 왕조가 강제로 개항에 합의하면서 미국인들이 선교사 대다수를 차지한 가운데 다른 나라 선교사들도 입국하여 개신교 발전의 역사를 재촉하게 된다. 1910년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국권 침탈이 일어나면서 유교 나라 조선은 망하고 기독교 진리가 꽃피는 대한민국이 준비되고 있었다. 맥클로흐는 일본의 1910년 국권침탈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한국 역사에서 한국 기독교의 역동성이 준비되었다고 평가한다. “한국인들의 지난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위치는 국가의 고난과 영광을 상기시킨다. 이곳에서 기독교는 오히려 식민주의에 대한 동조가 아니라 저항의 상징이었다. 이런 의식이 한국 기독교가 지난 반세기 동안 엄청난 역동성 가운데 성장하게 된 가장 큰 동력일 것이다.”(278) 물론 이러한 평가가 매우 일리가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은혜였음에 틀림없다.

<216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수학적 원리를 신으로 여긴 자들 : 피타고라스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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