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수학적 원리를 신으로 여긴 자들 : 피타고라스학파
단일성 자체가 어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결과이다. 따라서 어찌 되었든 비존재자는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다수 또한 있는 것이다.
단일성이란 흔히 말하는 한 가지만 있다는 뜻이 아니다.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대립 상황에서 드러나는 사물의 성질이다. 대립은 상대적 관계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정황 개념이다. 사물을 사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고유한 본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유한 성질은 본래부터 없으며 단지 상대적으로 변화 가능한 분량만 복잡하게 난무한다. 궁극적 존재란 본래 규정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상대적 관계를 통해 단지 규정하여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줄 뿐이다.
사물들을 분량으로 나타내는 방식은 수(數)를 통해서 가능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의 비율이 사물의 특성을 규정한다. 가령 ‘피타고라스 정리’로 잘 알려진 ‘a²+b²(직각을 둘러싼 두 변의 제곱)=c²(빗변의 제곱)’은 직각 삼각형이라는 사물을 규정하는 수학적 공리(公理)다. 이처럼 수적 관계를 통해 사물을 규정하고 나아가 만물도 수학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철학자가 있다. 주전 6세기경 살았던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80년경-500년경)와 이후는 피타고라스학파들이다. 무리수(無理數)의 등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타고라스학파가 시도한 만물을 수를 통해 규정하려는 시도는 그들 이후 2천여 년 후에 근대의 많은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사물 이해의 영감(靈感)을 불어 넣기도 했다. 모든 우주 현상을 수의 상호관계로 규정하려는 이들은 소리까지 수학적 원리로 설명하면서 이른바 ‘화성학(和聲學, harmonics)’ 의 창시자가 되기도 한다.
사물의 관계를 수의 비율을 통해 설명하려는 피타고라스학파는 사물들의 신비한 점에 주목했다. 예를 들면 수학적 공리를 통해 직각삼각형의 분명한 성질은 규명할지는 몰라도 그러한 삼각형의 절대적 원형은 결코 그릴 수도 없고 이 세상에서 불변의 그 대상을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분명한 직각삼각형에 대한 수학적 정답은 있지만, 그 정답에 부합하는 대상은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답에 대한 확신이 곧 잡을 수 없는 허상(虛像)을 좇은 셈이 된다. 수학의 법칙으로 사물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했지만 사물의 규정할 수 없는 신비로움에 대해 그들은 단지 궁색하게 진리의 세계는 감각 세계가 아니라 순수 지성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 학파에는 순수 지성의 세계에서 오직 수의 비율이 지배하는 경우가 음악이라는 세계다. 악기의 현(絃)을 수학적 비율로 조율하면 청각 신경과 뇌를 통해 우주의 조화를 소리로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수학적 비율로 현의 길이에 차이를 주면 음악 세계에서는 상이한 성질이 나타나면서 부조화처럼 보이는 신비한 조화가 생긴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면 사물의 차이는 본래의 성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적 비율의 차이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이른바 사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이라는 현상도 음악 세계를 지배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부조화의 조화’가 생기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피타고라스학파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수의 비율과 수의 법칙으로 환원 가능하다.
가령 ‘십진법’의 수학적 원리에 대해 이들은 거의 만물 창조와 보존의 원리를 발견한 것으로 보았다. 10 이후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 열 개 숫자의 반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10은 숫자의 세계로 보면 신을 뜻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피타고라스학파의 십진법의 의의를 소개한다. “10은 위대하고 전능하고 모든 것을 완성하며, 신적인 삶과 이승적인 삶의 시작이자 지도자라 불립니다. 그것은 완전자입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의 총체가 표시되어야 하는 곳에서는 십진법으로 계산됩니다(대립되는 것들의 표, 천체의 체계).”(429) 정말로 이들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수학처럼 존재한다고 여겼다. 십진법에 따라 우주도 열 개의 천체로 공전한다고 이해했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모든 우주와 만물 이해의 원천은 수의 비율과 조화였다.
그런데 피타고라스학파가 수학적 법칙으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에는 큰 결함이 있다. 수의 세계가 지칭하는 대상이 과연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 지성의 세계가 이성적 법칙에 따라 상상한 내용 없는 공허한 형식일 뿐이다. 아니면 그러한 상상력에 의해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곧 자기 감옥을 만든 꼴이 된다. 창조주처럼 보인다고 창조주 하나님이 결코 아니며, 사실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결코 진리일 수는 없다. 절대 진리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안내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은혜 중의 은혜, 자비 중의 자비이다. 철학의 헛됨 속임수와 노략질에서 우리를 보호하소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217호에 계속>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험난한 세상을 날아오르려면 |
서른여덟. 18-19세기 아프리카의 복음 전파와 아시아로 향하는 복음 진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