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마흔. 20세기 중반 서구 종교의 격변, 탈(脫)성경권위에서 인본주의 종교로
‘3년 동안 준비, 2,000명 참석, 4회 걸쳐 4년 동안 회의’ 이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9월 14일까지 로마에서 개최된 로마가톨릭의 제21차 보편공의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말한다. 두 명의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재위 동안에 개최되었다. 이른바 20세기 로마가톨릭의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로마가톨릭의 변화와 개혁을 꾀하였다. (물론 로마가톨릭의 개혁은 개신교 종교개혁처럼 ‘오직 성경만’ 교회의 절대표지라는 사실을 확정하는 데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인간관계의 질서’를 공의회 목표로 삼았는데 교황 요한 23세는 이 주제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라고 강조하며 개회연설을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라면 화형대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렸을 개신교도들을 관객으로 초청했는가 하면 수녀들도 초청하면서 가톨릭의 폐쇄성을 쇄신하고 외부와 소통하겠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주교의 역할을 교황의 우월성에 협력하는 관계로 규정하면서 ‘교황권지상주의’에 변화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로마 지역 이외의 감독들은 로마 감독인 교황과 권위를 ‘함께 나눈다’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 외의 다른 감독들이 교황의 권위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무오성(infallibility)을 더욱 견고하게 하려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 공의회에서 변한 내용을 좀 더 보면 자국어 미사 및 자국어 미사곡 사용(일부 성당에서 어쿠스틱 기타 연주도 허용했음), 신도들의 적극적 예배 참여 유도, 성당 내 많은 강대상 철거와 강단 하나만 사용, 2세기 동안 성경학자들이 제기한 문제 수용, 타 종교와 교회일치운동 전개의 개방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고통에 대한 공개적 사과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교리도 선포한다.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선포했으며 일부 주교들은 한발 더 나아가 마리아를 ‘모든 은총의 중재자’(390)로 선언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독신 정책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는가 하면 ‘인위적 피임’ 절대 불가라는 교황령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했다. 그 이후 이 사건은 5년 동안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통해 숙고하였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6세는 위원회의 의견들을 무시한 채 인위적 피임 요법의 절대 불가를 재천명했다. 그 결과 북유럽 성직자와 신도들이 특히 분노하여 저항했으며 당시 교황의 공적 표명에도 불구하고 아직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인위적 피임에 대한 수많은 가톨릭교도의 저항 사건은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93~1546)가 교황에 맞섰던 사건 이래 서방교회가 교황 권위에 가장 심각한 도전장을 내민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교황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교황 측에서는 여전히 ‘교황무오설’을 강조한다고 하지만) 이미 교황무오설을 과거처럼 신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반영한다고 본다. 즉 교권의 절대성에 대한 추락이 로마가톨릭에 분명히 일어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는 종교적 권위의 추락이 가속화하면서 종교도 ‘인간을 위한’ 종교 즉 인간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종교라야 한다는 세태의 강한 요구를 뜻한다.
이렇게 로마가톨릭 내에서 일어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종교 열망은 이제 로마가톨릭을 초월하여 개신교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북유럽에서 남미와 북미 그리고 아프리카로 이어진다. 남아메리카는 주로 로마가톨릭을 국가 종교로 삼았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곳이다. 그곳에는 일찍이 로마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북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가톨릭의 중요한 변화 즉 성직자들보다 신도들의 위치가 격상한 큰 흐름은 남미 전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남미가 직면했던 문제는 바로 ‘빈곤’이었다. 수 세기 동안 서구인들의 약탈로 폐허가 된 땅에 연명하던 신도들을 중심으로 가톨릭 내의 개혁을 주도하는 주교들이 등장했다. 당시 남미의 주교들도 대부분 보수적인 특권층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호 선교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페루의 빈민가에서 사제로 사역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페루의 가톨릭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 1927~)는 1968년 콜롬비아 대주교회의에 이어 1979년 멕시코에서 개최한 대규모 주교회의에서 1978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와 주교들에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사역”을 역설했다. 세계의 자원과 부는 “가장 가난한 자들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우선적으로”(398)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신부가 20세기 후반 성경권위가 추락하는 서구 기독교를 더욱 인간 중심적인 정치사회적 운동의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 解放神學)의 창시자다. 무력과 폭력도 정당한 운동 수단으로 적극 사용하는 당시의 마르크스주의 운동가들의 관심을 끌기도 한 해방신학은 남미를 벗어나 대한민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성경권위가 사라지는 서구 기독교는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회 운동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는 점점 그 기초마저 흔들리게 된다.
가난하고 힘없는 정치 경제적 빈곤층과 약자들의 지위를 정상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남미 주도의 해방신학은 이웃 북미 흑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정치 투쟁과도 연대한다. 남북전쟁으로 노예해방을 천명했지만, 현실은 그와는 달랐다. 특히 남부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여전히 흑인을 차별하고 탄압했다. 1950년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미국의 시민운동가들은 흑인 탄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인종 차별 철폐의 여론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이 운동을 미국 사회에 뿌리가 내리도록 한 인물이 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였다. 킹 목사는 성경과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 그리고 미국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hur, 1892-1971)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비폭력주의 방식으로 흑인 인권 회복을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1965년 일어난 앨라배마주 전역을 두 차례 행진했던 ‘셀마(Selma) 행진’을 이끌면서 킹 목사는 주일 설교 후에 잔혹하게 폭행당하는 신도들을 현장에서 목도했다. 이 장면은 TV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이 장면을 본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단과 종교를 초월하여 셀마로 집결했다. 교회 역사가 맥클로흐는 이 사건을 이렇게 정리했다. “전 세계에 유례없는 일로, 정의를 위해 기독교 교단들이 화합하고, 종교 간 협력을 통해 진행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위 운동의 한 장면”(401)이라고.
그런데 시민운동가와 목회자가 살해당하고 수백 명의 교인들이 폭행당하고 짓밟혔던 이 셀마행진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면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모인 20세기 서구 종교에서 성경권위를 바탕으로 하는 신학과 신앙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중심주의의 기독교가 점점 성경중심의 기독교를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 아픈 부분으로 각인되고 있었다.
<220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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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살아감은 올곧아야 하나니 |
마음과 외모를 잘 조화해야 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