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물을 즐기듯, 산을 즐기듯
子曰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자왈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논어 옹야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기고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임을 즐기고 어진 사람은 고요함을 즐긴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뻐하고(낙천적이고) 어진 사람은 장수를 즐긴다.”」
‘요’는 ‘기뻐하며 좋아하는 것(喜好, 희호)’이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모든 이치에 통달하고 있기에 두루 통하고 막힘이 없다. 그의 지혜가 마치 물 흐르듯 유창하다. 그 사람의 지혜가 물을 닮았다 해서 물을 즐거워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어진 사람은 의리 안에서만 평안해 하고 그것에 두텁고 신중해서 이리저리 뜻을 옮기지 않는다. 그의 모습이 산을 닮은 듯해서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긴다고 한 것이다. ‘동(지자동)’과 ‘정(인자정)’은 각각 그 본체로써 말한 것이고(動靜以體言, 동정이체언), ‘락(지자락)’과 ‘수(인자수)’는 각각 그 효과(용)로써 말한 것(樂壽以效言, 락수이효언)이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앎이 고요하다기보다는 물과 같이 상황 상황에 따라 변용되어 움직이는 것을 본체로 하고 그 앎이 상황을 바르게 설명해주고 통하고 막히지 않기에 그 효과로서 락이 있게 된다. 이에 비해 어진 사람은 고요하여 일정함이 있기에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인(仁)과 지(知)에 대한 깊은 체득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공자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배워야 할지를 가르쳐주고자 했다. 그에게 공부는 두 가지 대표적인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많은 지식을 쌓아 매사를 꿰뚫어 판단하여 상황 상황에 맞추어 통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내면의 세계를 고요하게 하여 늘 일정함이 있게 함으로써 중후한 덕으로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공자는 전자를 물의 흐름으로 후자를 산의 중후함으로 각각 비유하였다.
물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른다. 어디든 흘러갈 만한 곳이면 다 통하여 그리로 스며들어 간다. 지식 역시 그래야 한다.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서는 어떤 부분이든지 간에 전체적으로 맥락이 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통함으로 인해 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락(樂, 낙천적)이라 한다. 공부하는 자의 당연한 목표 중에 하나다. 한편 산은 먼 곳에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고 쉽사리 오를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산을 오르기 위해 그곳을 들어가게 되면 겉으로 본 것과는 다르게 그윽함과 깊음이 있다. 어떤 산이든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르게 될 때 그 산의 중후함을 맛볼 수 있다. 공부의 마지막에도 그 공부의 중후함을 맛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 안에서 장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요(즐거움)’와 ‘낙’ 또는 ‘동’과 ‘정’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이 물처럼 원활해야 하고 산처럼 변함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움직임은 물처럼 부딪침이 있어도 넘어서 갈 줄 알아야 한다. 말씀에 관통하여 매사에 막힘이 없이 통하도록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삶을 통해 늘 즐거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자 해야 한다. 한편 그리스도인의 고요함은 말씀 안에 굳게 서서 인생의 폭풍우와 찬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그 자리에 서서 요동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거기서 장수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물과 산이 지금도 우리 인생들 곁에 함께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더욱 그러하다.
대한의 선한 그리스도인들이여! 말씀으로 움직임을 삼아 그 말씀에 막힘이 없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 살아갔으면 한다. 영원히 함께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굳건히 서서 어떠한 환란과 역경 속에서도 생을 마칠 때까지 고요함을 유지하는 생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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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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