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광란의 디오니소스 축제: 창조주가 되려는 예술가의 뿌리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적인 광란의 축제에서 (……) 자연은 비로소 자신의 예술가적 환희에 도달하고, 그 축제에서 ‘개별화의 원리’의 파열이 하나의 예술가적 현상이 된다. 육욕과 잔인함으로 이루어진 저 혐오스러운 마녀의 술은 여기서 효능을 잃는다. 디오니소스적 열광자의 정서 속의 신비한 연합과 이중성만이 (……) 마녀의 술을 생각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쾌락을 불러일으키고 환희가 가슴으로부터 고통에 가득 찬 소리를 자아내는 현상이다. 최고의 기쁨으로부터 경악의 외침이나 혹은 보상할 수 없는 상실을 갈망하는 탄식이 울려 나온다.
디오니소스 신화는 성적 음욕의 무한한 발산과 난교(亂交)가 동반되는 광란의 축제를 배경으로 한다. 니체는 음탕함과 잔인함의 극치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 광란의 축제에서 그리스 예술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고자 했다. 니체가 볼 때 예술가의 바탕에는 동물적 야수성이 동반되는 성적 충동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을 배제한 그리스 예술 정신을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저지르는 욕정의 극한에서 자신의 본성이 비로소 예술가로서 동력을 얻게 된다는 이 ‘무서운’ 발상을 한 철학자가 20대 후반의 서양 고전 문헌학자 니체다. 위의 인용에 보면 ‘개별화의 원리가 파열된다’는 구절이 있다. 개별화의 원리란 타인에 대해 그리고 자연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을 독자적으로 확립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별화의 원리는 현대어로 말하면 ‘주체성’과 유사하다. 자신의 존재를 다른 무엇과 구별하고자 하는 근본 욕구가 개별화의 원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니체는 이 개별화의 원리를 경계하면서 규정한다. 경계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적 충동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의 개별화 혹은 개체화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개별화 의지는 자연에 함몰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별적 의지의 고향이 바로 예술가적 충동이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예술가는 본능적 충동이나 욕구 혹은 의지가 자연과 분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진정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자기 분리를 시도하는 개별화 욕구는 자연적이거나 동물적 충동에 ‘의식적으로’ 복귀할 때 정당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의식화에 충실한 방법은 언어적 이론이나 논리적 개념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술가’ 방식이어야 한다. 예술가의 창작 의지만큼 본능적 충동이 지배하는 것은 없다. 자신의 창작 의지는 마치 우주 만상의 창조주가 되었다는 확신 속에 갇히도록 한다. 허구 중의 허구에 매몰당하고 있는데 이것을 자연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착각한다. 이렇게 예술가를 지배하고 있는 허구 조작 의지를 니체는 개별화 혹은 개체화의 원리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로 본다. 개별화의 원리를 극복한다는 것이 전체의 관점에서 각각의 사물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본다면,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한 문헌학적 탐구를 통해 결국 고전 문헌학 교수 니체가 도달한 전체에 대한 이해는 극단의 성적 방종과 동물적 야수성이 뒤얽힌 신화의 주인공 ‘디오니소스’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서구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의 존재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 자라난 예술가에게서 찾았다는 점은 니체 스스로도 많이 놀랐을 것 같다. 육욕과 잔인함이 들끓는 광란의 축제를 연상하면서 니체는 논리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시도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창조주의 비밀을 동물이 먹잇감을 찢어발기는 현장을 재현하는 광란의 축제에서 인간의 본능과 자연의 본성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여긴 것 같다. 루터교의 율법에 짓눌렸던 니체에게 인간의 본능을 달래며 대변하는 그리스 신화는 그야말로 ‘출애굽’의 복음이었을 것이다. 니체는 고통과 쾌락이 교차하고 환희가 다시 고통의 근원이 되는 광란의 축제를 예술가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으며 그래서 창조주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했다. 니체가 앞의 인용에서 “최고의 기쁨으로부터 경악의 외침이나 혹은 보상할 수 없는 상실을 갈망하는 탄식이 울려 나온다”고 할 때 이는 기쁨과 경악을 초월하면서 자기 파멸을 갈망하는 최고의 예술가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 예술가가 우주 만상의 주인인 창조주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고 싶었다.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벧후 2:2)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 여과 없이 분출하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자연과 합일한다는 허구의 조작을 통해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었다는 착각에 던져진 사건이다. 니체는 이러한 본능적 충동을 예술가의 창작 의지를 길러내는 근본 동력으로 보고자 했다. 창조주의 자리가 사라지면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피조물의 타락한 자기중심적 본능은 스스로 창조주가 되었다는 착각을 만족스러운 단계까지 조작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주가 이 세상의 심판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동물과 같은 인간이 벌이는 광란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몰입할수록 니체의 의지는 점점 ‘신은 죽었다’는 착각의 늪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버려 둔 타락한 인간 본성이 니체가 숭상했던 광란의 디오니소스 신화였다. 그리고 니체는 어린 시절 자신을 기만하고 억압했다고 여긴 성경과 신학을 의식에서 몰아낸 자리에 이 신화를 배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니체의 발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 증거이며 그의 존재를 확증하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지중해 문화를 지배하던 시절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주권자가 누구인지 아래와 같이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4-32)
<229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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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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