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부를 구해 얻는다 한들 무얼 하리
子曰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자왈부이가구야 수집편지사 오역위지 여불가구 종오소호
논어 술이의 계속이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만일에) 부(자가 되는 것)가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사람이 되더라도 나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만약에 부가 구해서 얻을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리라.”
‘집편(執鞭)’은 천한 일이다. 공자가 보기에 부가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비록 천한 일을 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으면 또한 사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공자 자신의 확신으로는 부를 이루는 것이 천명에 달려 있을 뿐이어서 구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 스스로 부를 구하느니 오히려 의리에 편안하여 지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에게 부를 얻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소신을 버리고 한갓 수치만을 갖다 줄 뿐이었다.
소씨(蘇氏)는 이것을 아예 성인(공자)이 일찍이 부를 구하는 것에 뜻을 둔 적이 없었으니 어찌 그 가함과 가하지 않음을 묻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공자가 애당초 부를 구하지 않을 것을 스스로 결단하고서 그렇게 말한 것으로 주석하였다. 양씨(楊氏)는 조금 다른 면에서 군자라고 부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부조차도 하늘에 달려 있다고 믿기에 이것을 구할 수 있는 방도가 공자 자신에게는 없다고 주해하였다.
공자가 부를 구하지 않고 도를 구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유교적 계층 질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체계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유교사회에서 도를 추구하는 선비계층이 제일 고귀하게 대접을 받았다. 그다음이 천리에 순응하여 자연스럽게 열매를 거두는 농사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자신의 재능이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공업인이 그다음의 계층을 이루었고, 상업인, 곧 물건이나 상품을 활용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좀 교활하게 사적 이익을 위해서 이득을 붙여 소인배의 짓을 하는 종사자들이 최하류의 계층으로 인식되었다.
주목할 것은 소씨와 양씨 두 사람이 모두 공자가 부 자체를 구하려 하지 않은 성인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소씨는 공자가 부에는 일찍이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양씨는 아예 공자에게는 부를 구하는 방도가 차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공자의 부를 구하지 않는 군자의 자세를 모범으로 하여 후대 유교 세계에서 누구든지 부를 구하는 것을 원초적으로 차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자라고 모든 것에 통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능한 일이 많다고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더욱이 부를 이루어야 남을 다스리거나 숭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많은 소인들이 그렇게도 추구하는 부를 향해서 소위 군자라는 자가 달려가서야 되겠는가. 유학이 끝까지 내세우는 것은 도를 편안해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다. 즉, 하늘의 도리를 따름과 실천하는 것이 유학의 극치다. 군자라면 마땅히 이 도의 실천으로도 충분하며 이외에 부와 명예까지 거머쥐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군자가 천리를 좇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부를 추구하는 것은 그의 할 일이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의 쓸 것과 필요한 것을 모두 준비하시고 때에 맞추어서 그 필요한 것들을 갖추어 주신다. 그 이상 무엇을 구하랴.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가르침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되, 재물과 육신의 축복보다는 ‘영혼의 잘됨’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부를 추구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그리스도인의 부는 일용할 양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충족되었을 때 영혼이 먼저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의 획득에 있어서 육신보다는 영혼의 잘됨이 먼저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부의 획득과 사용은 다른 형제들, 곧 그리스도인 형제들과의 나눔을 위한 것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대한의 그리스도인이여! 우리의 부는 하늘에 쌓아두고 세상에서는 우리의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 자신과 가족과 부모와 친척,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위해 쓰이도록 하자. 이렇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 굳이 부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그러기에 끝내는 하나님께서 모두 다 거두어 가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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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루터의 종교개혁, 그리스 신화의 부활 |
쉰둘. 네스토리우스파의 양성론과 부분타락론, 인도와 중국으로 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