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억압의 술책, ‘자유’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니체 이후의 현대철학 <23>
서양 합리성의 추악함에 대한 니체의 폭로를 더 발전시킨 사상가로 우리는 미셸 푸코를 들 수 있다. 추악함이란 (앞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우선 야만을 압도한다는 합리성이 다름 아닌 타인 지배 전략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감동적인 윤리적 판단은 타인을 더 철저하게 억압하기 위한 속임수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선하게 행동하는 본바탕에는 타인 지배의 사악함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점을 니체가 해부하고 폭로했으며 또한 푸코가 그 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니체가 보기에 이른바 진리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며 조작된 역사다. 본래부터 진리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서로서로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날조물이다. 그래서 진리의 역사는 가장 저급한 동기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이며, 거들먹거리는 얘기일 뿐이고, 폭력적으로 부과된 해석들에 지나지 않는다.
푸코가 보기에도 서양 근대인들이 행한 가장 큰 거짓말은 ‘권력과 상관없는 순수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독립된 진리가 있으며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교묘하게 날조되어 억압하기에 유용하도록 구성된 가설에 불과하다. 갖가지 미려한 수사학적 판단들은 단지 ‘생명통제권력’bio-power일 뿐이다.
그런데 생명통제권력이 삼고 있는 표적이 있다. 바로 ‘인간의 신체’다. 현대 이전까지 권력은 주로 드러내 놓고 피지배자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때로는 갖가지 교훈으로 달래기도 했으며, 혹은 계약 관계를 통해 권력의 요구를 조절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와 있다. 이를 테면 ‘국민복지’라는 이름으로 꽤나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건강이 최고의 자산이라고 일깨우면서 몸에 대한 관심을 줄기차게 강조한다. 국가권력이 마치 국민의 건강을 위해 있는 듯 선전한다. 하지만 푸코가 볼 때 이러한 정책 뒤에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치밀하게 계산된 권력장치가 작동하고 있다.
더욱이 신체 억압의 메커니즘은 각 개인의 자신에 대한 지식 증가를 통해서 더욱 심화된다. 예를 들면 자신의 건강과 관련해서 환자가 의사에게 받는 면담이 대표적인 예다. 자기 자신의 건강에 대한 증폭된 관심이 갖가지 전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의사 앞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행위는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환자의 몸을 돌보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이는 상담 이후 신체억압의 네트워크만 확대하고 견고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 권력은 과거에 강요했던 자백의 방식만 다를 뿐, 신체에 대한 억압과 ‘고문’은 여전하며, 어떤 면은 더 간사하고 치밀하다. 중세 교회에서 근대까지 서양인들에게 계속된 ‘고해성사’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 자체였으며, 동시에 공개된 처벌과 고문의 절차였다. 모두 인지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종교 세력에 결코 저항할 수 없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국가권력과 종교세력이 연합하여 국민들을 억압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푸코는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 갖가지 고문 도구들은 우리 시대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들인가? 물론 푸코는 아니라고 한다.
푸코에 의하면 현대권력은 지배방식이 미미하게 보이지만 세밀하고 치밀하다. 사회적 실천에서 행위자가 억압당한다는 의식을 해보지만, 자신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도록 한다. 현대권력의 억압장치들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다. 그래서 권력의 성공은 억압기술을 얼마나 교묘하게 숨기느냐에 달려있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의 “권력은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을 숨긴다는 사실을 조건으로 해서만 견딜 수 있다. 자신의 성공 여부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숨길 수 있는 정도에 비례한다.”
신체에 가해진 억압 특히 성(sex)의 경우에는 더 교묘하다. 일면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는 갖가지 윤리적 선을 날조해서 인간의 본성을 억압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에너지는 생산(품)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윤의 극대화를 근본이념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학은 이미 정치학이며 동시에 의학이며 생리학이고 교육학이 된다.
이처럼 이윤 증가만 할 수 있다면 국가 공권력의 어떠한 사용도 허용된다. 그리고 그 공권력은 인간의 모든 신체를 전면적으로 길들이고 통제하는 의학기술과 직결된다. 또한 인간의 기본욕구마저 조절하겠다는 생리학의 발전을 가져온다. 이것을 ‘국민의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교육 하면서 그 지배력을 확산시킨다. 듣기 좋아 ‘건강 상담’이지 중세시대에 강요받았던 고해성사와 그 본질은 전혀 차이가 없다. 갖가지 건강의 지표들은 생명에 대한 통제를 더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전부다.
푸코를 따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자유와 행방을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정말로 가장 가공할 거짓말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다고 야단법석들이다. 권력의 교묘한 지배기술에 유린당하고 있는 줄 모르고 말이다. 그리스도의 다음 말은 억압과 통제 사슬에서 헉헉거리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다.(요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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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전도사 (철학박사, 포항성진교회)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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