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5-01-18 18:5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허무주의와 테러리즘


현대철학의 근원은 니체다. 왜 니체인지는 그의 예언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적중하고 있는 바를 보면 알 수 있다. 니체는 자기 글을 그의 사후 1세기를 넘어서야 알 수 있다고 예언한 바 있다. 그의 예고는 불변의 가치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허무주의’가 더욱 가속화할 것이며, 멈출 수 없는 ‘권력의지’가 인류 사회를 더욱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권력의지의 정점에 자리 잡은 세계 패권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무자비한 테러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죽음의 기관차가 되어 시대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미국과 서방을 순식간 혼돈에 빠뜨렸던 9·11 테러는 전화나 인터넷과 같은 소통 수단들 그리고 철도역, 다리, 공항과 같은 교통 시설의 폐쇄로 마치 세상의 종말을 겪는 듯한 일을 초래했다. 대통령은 비행기로 대피하고, 부통령은 비밀 벙커로 갔으며, 국방부는 불길로 휩싸이고, 권력의 상징 백악관은 텅 비게 되었다. 이슬람 테러 조직이 주도한 9·11 테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세계 제국의 심장부를 속전속결로 강타한 그야말로 기습 공격이었다. 미국이라는 공격대상은 분명했지만 공격을 주도한 세력의 실체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전쟁의 특징이다. 이 테러는 세계의 모든 매체를 통해 지구촌에 무수히 방영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세계에 방영될 것이라는 것은 테러리스트들이 당연히 예상했던 바다. 그것은 그들이 세계와 소통하려는 방식이자 전략이며 전술이기 때문이다. ‘소통의 방식으로서 테러리즘’, 무모한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가열되는 일방적 선전 포고의 이 방식은 일견 어떠한 정당성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전 세계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방법으로 보면 테러리즘은 강대국이 주도하는 유엔의 평화적 시도를 비웃고 있다. 정말로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이슬람 국가들의 일방적 소통 전략인 테러리즘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쯤에서 우리는 니체의 말을 흥미롭게 떠올리게 된다.
니체는 자신의 자서전과도 같은 『이 사람을 보라』에서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를 자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다.” 그리고 앞으로 현대를 이렇게 예고한다. “지상에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나와 함께 비로소 위대한 정치가 펼쳐지게 된다.” 도대체 니체는 무엇을 보았는가? 현재 세계 시민을 가장 가까이서 위협하는 무서운 실천 즉 테러리즘을 보고 던진 말인가? 테러리즘은 니체가 말한 큰 전쟁의 한 징후일까?
군사력의 상징인 미 국방부를 위협한 테러는 니체가 말한 현대에 벌어질 전대미문의 전쟁을 위한 신호탄인가? 철학자인 니체의 예고를 단지 철학적 개념 분석으로만 정리하기에는 그의 예언이 무섭게 적중하고 있다. ‘신의 죽음’이라는 선언과 함께 20세기 초엽부터 터진 세계 대전은 그 후 2차와 3차는 물론 제4차 혹은 5차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근대에서 시작하는 서구 중심의 화려하고도 막강한 인간 중심적 철학과 지식 그리고 과학 기술은 몇 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다. 마치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뭔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낙관론도 지배적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특히 합리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상적인 담론(談論) 형성의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것은 이제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순진한 진단으로 드러나고 있다. 뭔가 소통이 가능하기 위한 대화와 타협은 우선 거대한 폭발음으로 팡파르를 울려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니체의 예고대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는 ‘전대미문의 전쟁’은 이제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는 무서움이다. 멈출 수 없는 패권에 대한 무한 의지 즉 ‘권력의지’의 전개과정을 보면, ‘위기가 기회’라는 말은 적어도 테러리즘에는 적용할 수 없다. 테러리즘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준비와 시도는, 힘의 무한한 상승이라는 권력의지의 구조로 볼 때, 다가올 더 큰 테러행위의 세트장을 마련해 줄 뿐인지도 모른다. 허무주의의 논리에서 보면 인간은 어떤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건설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데서 자기 의도를 드러내는 속성이 있다.
창조와 개발은 더 큰 파괴를 위한 과정이지 그 자체를 유지하고 보존해야 하는 삶의 가치들이 아니다. 현재보다 더 강력한 다이너마이트를 제작해서 무엇이라도 모두 끝장을 내는 것이 자기 전개의 메커니즘이자 동시에 정당성이 된다. 이처럼 니체가 발견한 ‘허무주의’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이 괴물이 그의 예언처럼 전 지구를 뒤덮고 있다. 거듭되는 파괴는 그 괴물이 이제 분명하게 활동할 것이라는 징후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불길한 예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2천여 년 전 헤롯 가문이 40여 년 동안 짓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멸망 예언을 잘 알고 있다. 결국 예언 40여 년 후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처참하게 불타고 잔혹한 대량 학살로 예루살렘은 멸망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 심각해진다. 테러의 본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섭리 유형의 하나임을 알아야 접근가능하며, 어떤 폭탄 테러에도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실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우선 다음 예언을 심사숙고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이것을 삼일 만에 세울 것이다.”(요 2:19)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테러에 대한 테러리즘: 허무주의의 순환 구조
테러리즘: 허무주의가 낳은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