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도(道)를 도라 하면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노자(老子)』의 첫 두 구절이다. 앞의 구절은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이고, 뒤의 것은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를 뜻한다. 도는 드러나지 않아서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無名, 무명), 명은 드러난 것이어서 이름이 있다(有名, 유명).
도는 도(Tao)의 의미와 길(the Way)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도를 도라 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 해석하더라도 틀리지 않는다. 다만 도를 도로만 이해하려 하면 추상적이어서 어렵다. 하지만 도를 길로 해석하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길은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다. 도가 길이라면 그것 역시 볼 수도 있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산을 산이라 하고 강을 강이라 하는 것은 이름을 이름(naming, calling)하는 것이다. 자연의 현상이나 인생살이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태들에 대하여 각각 그 명칭으로 부르는 것도 이름 하는 것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자연이 가는 길이다.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이라 이름 함으로서 사계절은 각각의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인생의 하루 생활도 길이다. 그 삶에 각각 명칭이 붙여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더 나아가서 동물들의 생활방식, 식물들의 생존방식 등이 모두 길이자 이름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체의 생활양식이나 우주와 자연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 모든 변화는 길(道, 도)요 이름(名, 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노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세상과 우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모든 천차만별의 우주의 현상이나 변화를 길(Tao)로 이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끝도 없는 우주와 자연의 변화, 종류도 알 수 없는 온갖 식물의 번식과 스러짐, 온갖 동물의 삶과 죽음, 자연의 변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과 사태들, 그것들의 모순과 대립 등등을 목도하면서 그는 이 전체를 길로써 이해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매년 맞이하는 봄여름가을겨울이 과연 이전의 그것들과 똑같은 길을 가는 것인가. 아니다. 사계절은 단 한 번도 똑같이 변화한 적이 없다. 자연은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길도 늘 그러한 길일 수가 없다. 그래서 ‘비상도’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살아왔던 모든 인생들의 삶이 똑같은 적이 없으며 자연의 모든 현상이 똑같은 적이 없었다. 그것들은 똑같아 보이는데도 똑같지가 않다. 그것은 예컨대 축구를 하는 선수가 매일 똑같은 폼을 갖고서 축구를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한 순간도 그 폼이 똑같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주만물은 분명히 길을 가기는 가지만 그러나 그 길은 늘 그러하지가 않다.
노자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도가도비상도의 현상은 ‘자연(自然)’한 것, ‘스스로(저절로) 그러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기에 나를 바르게 하려고 억지로 애쓸 것도 없고, 가정을 잘 다스리려고 힘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 나라의 다스림도 자연의 운행만큼이나 제길 가는 대로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들은 이 자연한 세계에서 그에 순응하여 무위(無爲)와 비움(虛, 허), 곧 자연스러움과 겸허함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억지로 하지 않아도 우주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무위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에 순응하려 함이 자연이다. 기독인에게 우주와 자연과 세상의 온 만물이 도가도비상도의 현상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에 의해서다. 기독인에게 우주만물과 인간의 삶은 단언컨대 저절로 그러할 수가 없다. 기독인에게 모든 길은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에 의해서 길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노자의 무위와 자연의 사상이 기독인에게 주는 의의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기독인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하려하기보다는 인간의 욕심에 찬 사욕을 없애버리고 비움을 배워갈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났다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이 모든 인생이 가야하는 길이다. 그 길에는 고통과 눈물, 근심, 절망 등이 있을 수 있고, 기쁨과 행복, 만남과 헤어짐 등 온갖 일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인생길에서 기독인은 자신의 겉 사람의 모습은 낡아지고 망가지고 썩어지는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의 길조차 사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는 그(그녀)의 영혼이 어떠한 인생길을 걷게 되든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고자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인은 세상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인이 가야할 길이다. 이 길 안에서 기독인은 무슨 일을 만나든 자신의 사욕으로 하지 아니하며 그에 순응하면서 묵묵히 즐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개인, 가정, 교회, 직장, 그 어느 곳에서나 언제이든지 자신의 사욕을 없애가면서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길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을 즐겨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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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
도(道)를 보아도 볼 수 없을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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