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배움의 길을 어떻게 가야할까
大學之道 在明明德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고
대학지도 재명명덕
在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재신민
在止於至善 지극히 선한데 머무르는 데 있다
재지어지선
(經一章)
「대학」(大學)이라는 책은 본래 『예기』(禮記) 안에 있는 한 편명이었다. 「중용」도 『예기』(禮記) 의 한 편명으로 있었다. 그런데 주자(본명은 주희, 1130~1200)가 예기 안에 있던 두 편의 글이 유학에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책으로 뽑아내어서 대학, 중용을 논어와 맹자와 함께 사서(四書)로 묶었던 것이다. 그리고서 성현의 배움을 배우는 순서로서는 먼저 대학을 읽고 그 후에 논어를 그 후에는 맹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는 것이 사서의 배우는 순서라고 하였다. 삼경의 경우는 먼저 시경을 읽고, 서경을 읽고, 끝으로 역경(주역)을 읽는 것이 순서라고 하였다.
대학 경문의 첫 구를 장식하고 있는 본문은 사실 유학 전체 사상의 개관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본문이 배움을 시작하는 사람이 닦아야 할 규범이자 행동의 강령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용은 인간의 (본)성을 태어날 때 받게 되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규정한다. 큰 배움을 이루어가는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성이 있어서 본성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태로 된다는 근거가 된다.
‘대학지도’는 큰 배움의 길로 번역된다. 대학은 서양의 ‘유니버서티(university)’와는 다르다. 서양의 대학은 문과분야와 이과분야의 학문이 연합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동양 특히 우리나라에서 대학은 큰 배움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큰 배움의 길에는 세 가지 배움이 있다. 그 첫째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명명덕)이고, 둘째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신민)이고, 셋째는 지극히 선함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지어지선)이다.
명명덕은 문법적으로 앞의 명은 ‘밝히다’라는 동사이고 뒤의 명은 ‘밝은’이라는 형용사이다. 주자는 밝은 덕을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 인의예지의 사덕을 하늘로부터 받아서 태어난다. 이 덕은 완전히 선하고 변함이 없고 온전하다. 배움은 이 하늘에서 받은 인의예지의 덕(마음)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하고 실천해 감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길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문에는 ‘신’(新)이 ‘친’(親)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해석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친은 ‘친애하다’라는 동사이기에 ‘친민’일 경우는 ‘백성을 친애하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특히 양명학에서는 백성을 친애해야 함을 강조한다. 큰 배움을 이룬 사람은 모든 사람을 어버이처럼, 형제처럼 친애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유학에서는 ‘친’이 아니라 ‘신’으로 해석한다. 사람은 배워가면서 진실로 새로워짐을 맛보면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 간다(苟日新 日日新又日新 -대학 전문2장). 배우는 사람은 자신이 새로워짐과 동시에 다른 사람도 새롭게 해야 한다. 유학이 친 대신에 신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학의 근본사상 중에 하나인 ‘수기치인’(修己治人;자신을 닦고 나서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큰 배움의 마지막은 이 선함에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다. ‘지’(止)는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지극히 선한 것에는 인의예지의 사단을 온전히 간직하고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서 성현의 삶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머무는 것이다. 모든 유학의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최고의 선한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큰 배움의 길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기독인이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은 무엇인가. 배움의 자세와 실천일 것이다. 기독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다.(마11:28~30) 이것이야말로 기독인들에게 큰 배움의 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하셨기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으셨다. 마땅히 주의 자녀들인 우리도 이 온유와 겸손을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날마다 자신이 새로워지고 다른 사람을 새롭게 하는 배움은 기독인 자신을 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새롭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새로움을 전하는 자가 되도록 깨우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할 수만 있다면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움을 맛보아야 한다. 늘 자신이 새로워지고 다른 사람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마음을 전하고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지극한 선에 머무름은 우리 기독인에게 예수님과 하나 되어 그분과 일체된 삶을 살아가도록 독촉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기독인은 성경이 말하는 선한 곳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 마가 사도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섰다”라고 하였다.(막13:14) 우리나라의 성도들의 삶에서 목회자들의 삶에서 교회 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혹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은 아닌가. 만일에 그렇다면 그곳에 재앙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선하셔서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대한의 기독인이여! 철저한 자세로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서 우리의 마음을 선하게 간직하기로 하자. 나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과 더불어 늘 새로워지는 마음과 행동을 보이자. 그리고 예수님과 일체가 되어 늘 그분 안에서 살아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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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박사(교육학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
단순한 앎에서 열매 있는 얻음으로 나아가야 |
하늘의 길, 성인의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