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0-11-08 11:3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명제적 진리의 착각


언어와 관련해서 보면 진리는 참인 명제를 뜻한다. 가령 “박홍기는 남자다”는 문장이 참일 때 참인 명제가 되고 진리가 된다. 주어인 ‘박홍기’와 서술어인 남자가 일치할 때 진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범위가 더 넓은 개념인 남자 속에 상대적으로 범위가 좁은 ‘박홍기’가 속할 때 참이다. 그리고 서술어의 조사가 ‘이다’ 혹은 ‘아니다’로 끝나야 한다. 가령 “박홍기가 남자인가?”라는 의문문에 대해서는 결코 진리를 거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박홍기’가 남자라는 개념 속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장이라고 해서 모두 명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명제라고 해서 모두 참일 수는 없다. 가령 “박홍기는 남자가 아니다”는 거짓인 명제다. 진리는 명제 가운데 참인 명제를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어쨌든 명제는 거짓과 진리가 머무는 곳이 된다.

  진리란 말은 본리 ‘숨겨져 있던 것이 밝히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는 헬라어 ‘휘파르케인(ὑπάρχειν)’에서 왔으며 ‘눈앞에 나타나 있다’는 뜻이다. 그 무엇이 눈앞에 나타나려면 그 무엇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은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진리는 명제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즉 명제가 참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대상을 눈앞에 나타내게 하려는 상황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엇인가를 사실대로 눈앞에 보여주려는 사건은 무엇에 근거해서 일어날 수 있는가?

  명제와 관련된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인 현존재(Dasein, 現存在)를 떠나서는 어떠한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참인 명제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언어 행위(Reden)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앞서든 예에서 보듯이 “박홍기는 남자이다”도 가능하지만 “박홍기는 남자가 아니다”도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즉 전자가 참일 경우는 후자가 거짓이 되지만, 후자가 참이 된다면 전자가 오히려 거짓이 된다. 어떤 명제든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 있는 가변성이 바로 진리가 만들어지는 본래적 상황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대적 진리 상황을 더 철저하게 사유함으로써 인간 현존재가 영원한 진리의 발원지가 됨을 보여준다.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명제의 특성은 ‘이미 항상 존재하는 진리’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명제의 진리값이 유동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현존재 내에서 이미 있었던 진리를 언제나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동일한 명제가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는 사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리가 언제나 드러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참인 명제도 거짓이 될 수 있다는 자기 부정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거짓도 참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를 남긴다. 참과 거짓이 언제라도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 명제의 원초적 상황이다.

  이처럼 동일한 명제가 자기모순성을 띤다는 것은 의미를 새롭게 규정해가는 것과 직결된다. 즉 시간적 존재인 현존재의 삶이란 바로 ‘지속적인 해석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존재하는 본래적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명제에 이미 있었던 본래적 진리가 드러난다는 말은 의미를 규정하는 행위(정의, 定意)가 곧 해석 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수립하는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해석을 다시 해석하는 과정이며 언제나 부정당할 수 있고 또한 언제나 창조될 수 있다.

  해석으로서 진리는 언제나 ‘무엇으로서의 구조’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를 늘 먼저 의식해야만 한다. 독립적이지 않고 항상 ‘그 이전의 존재를 현존재의 내면에서 의식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곧 해석의 상대성이 극단화되면 될수록 항상 존재해야만 하는 ‘그 대상’의 기억이 더 뚜렷하다는 뜻이다. 영원한 진리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영원한 진리의 주인이 참과 거짓을 언제나 만들어 낼 수 있는 현존재인 인간이다.

  현존재가 명제적 진리를 구성함으로써 언제나 이미 있었던 존재의 진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창세전에 존재했으며 우주만물을 작정하신 대로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심판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영원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선(先)이해는 창세전에 모든 것을 작정하신 신의 존재를 필요 없게 한다.

  주어진 상황마다 현존재인 인간이 명제를 정립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초월적 진리가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없앤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명제적 진리론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해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가 곧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체계적인 부정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주인은 인간이 된다.

<다음 호에는 ‘현대 언어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를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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