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2-05-09 21:3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허무주의: 자기 눈을 찌른 외디푸스 신세


허무주의: 목표가 결여되어 있으며: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결여되어 있다.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하는 것.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us)는 ‘무(無)’와 관련된 문제다. ‘무’를 서술어로 사용하면 긍정(肯定)에 대한 반대로서 부정(否定)을 뜻한다.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문장은 긍정명제다. 이 명제를 부정명제로 나타내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된다. 서술어 활용법으로 보면 허무주의는 주어진 모든 것을 항상 부정하는 본성과 그 태도를 반영한다. 단지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분명한 진리에 대해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본능적 성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삶의 ‘의미’와 관련짓는다면 ‘무’는 ‘무의미함’ 그 자체다. 어떤 유용한 삶의 가치를 제시하더라도 ‘무’의 논리에서는 결국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어떤 것도 지금 현재 상태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 혹은 본성이 바로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긍정명제에 대해 항상 부정명제나 모순명제를 만들어 주어진 현실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거부와 부정의 논리가 바로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가 지배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근본적 고민을 철학적 명제로 정립하여 ‘허무주의’로 규정한 철학자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다. 앞의 인용에서 보듯이 니체는 허무주의를 ‘목표’가 없다는 점을 결정적 특징으로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허무주의 논리를 충실하게(?) 몸소 경험하려면 목표란 반드시 없어야 한다. 니체의 말로는 ‘무서운 손님’으로 비유되는 허무주의를 주체로 놓으면, 허무주의는 세상에 설정된 모든 목표를 없애버리면서 그 세력을 전 지구로 확대한다. 긍정명제로 제시되는 모든 사실과 진리에 대해 미래에 실현될 가치의 측면에서 무용론(無用論)을 제기하는 본성이 바로 허무주의다. 목표란 언제나 현재의 진리를 긍정함으로써 설정된다. 지금 나 자신의 실존을 긍정할 수 없는데 미래의 자기 실존을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니체가 말하는 ‘목표의 부재’로서 허무주의는 결국 불변의 진리로 일컫던 모든 대상들 즉 하나님, 자아, 자유 등을 부정하게 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현재의 구체적 실존을 미래 실현 가능성이라는 허구를 통해 통제하는 억압 장치다.
그리고 니체는 허무주의 메커니즘은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유’ 혹은 ‘의미’에 대한 궁극적 대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말한 미래에 설정하는 목표가 허구라는 지적과 연관된다. 미래에 실현된다고 믿는 것 자체가 허구이므로 무서운 손님 허무주의는 현재 사건에 대한 의미 부여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허무주의의 공포는 실존의 의미 부여는 물론이고 주어진 사실의 원인 규명도 무한 소급됨으로 던지지 말라고 압박한다. 이렇게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목표를 정신적으로 모두 통제하는 본성과 경향이 바로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는 허무주의다. 니체는 이 현상을 ‘최고 가치들의 탈가치화’라고 규정한다. 최고 가치는 우리 삶을 지배하거나 이끌어가는 일종의 절대진리에 대한 확신의 체계로서 미래의 목표와 현재의 의미를 모두 통괄하는 지배 논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가치들이 설정되면서 인간의 삶이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니체는 이것을 반드시 붕괴될 수밖에 없는, 반드시 붕괴시켜야만 하는 삶의 족쇄들이다.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볼 때, ‘허무’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자신의 논리대로 말한다면 자신도 자기 늪에 빠진 신세를 만든다. 모순이며 비극이다. ‘허무’에 대한 자신의 확신이 강할수록 그것은 자기 의지의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허무 곧 빠져나올 수 없는 더 깊은 늪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모순과 비극의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너무 깊은 심연의 무저갱(無低坑)을 파 놓은 니체는 자기 시대 이후에 나타날 두 세기를 그 구덩이로 몰아넣는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음 두 세기의 역사이다. 나는 다가오고 있으며, 더 이상 다르게 올 수 없는 것을 기술한다. 허무주의의 도래. 이 역사는 지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성 자체가 이미 여기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518) 인간의 정신과 의식을 지배하는 허무주의를 예언자의 심정으로 알려준다고 하지만 달리 보면 허무주의의 지배를 이후 두 세기에 걸쳐 지배 논리로 강요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니체가 본 허무주의는 자신이 만든 것이라기보다 삶을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인간 의식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 진리의 실체는 철저하게 부정하면서도 허무주의에 대한 확신은 어떤 대상보다 더 확신하기 때문에 허무주의는, 처녀작 『비극의 탄생』부터 출판하지 못한 많은 유고(遺稿)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유 과정을 지배한다. 파괴와 건설, 불신과 확신, 자유와 억압의 방식으로 두 극단을 오고가는 모순과 그로 인한 비극을 니체는 바로 논리적 개념이 아닌 은유적 표현인 ‘허무주의’라는 말에다 담았던 것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적 심리적 개념인 ‘도덕적 양심’을 그렇게 증오하면서도 ‘어린아이의 순진무구와 생기발랄함’과 같은 순결한 가치창조에 목을 맨 니체를 보면, 너무도 비도덕적이어서 너무도 도덕적인 자기모순과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외디푸스를 연상시킨다.
허무주의를 통찰하는 순간 이미 헤어날 수 없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는 니체와 그러한 니체의 아이들인 현대인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위로를 위해서라도 니체보다 더 깊이 더 극단적으로 사유했던 자를 찾아야 한다. 극과 극을 오갔던 한 인물을 우리는 구약에서 찾는다. 지혜자 솔로몬 왕이다. 그는 피조세계의 구조가 ‘허무’임을 니체 앞서 3천여 년 전에 통찰한다. 솔로몬이 ‘허무’를 깨닫고 내린 결론은 인간 사유 자체가 허망한 욕구라는 사실이었다. 모든 세상사를 고민하는 궁극적 목적이 인간의 지적 욕망을 달래는 수단에 불과하다. 솔로몬은 인간 무지의 근본을 폭로함으로써 (피조물의 의지와 관계없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경외를 알려준다. 창조부터 심판까지 모든 피조물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유가 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 모든 사건의 진위(眞僞)와 선악(善惡)을 판별할 수 있는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전도자(傳道者)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12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 12-14)

<225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변화의 목적
물을 즐기듯, 산을 즐기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