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2-08-31 20:5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마흔다섯. 21세기 기독교 양상: 종교 전쟁의 재현


살아남기 위해 소총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말미암아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은 1948년 폴란드 공산당 비밀경찰에게 살해당한 폴란드 사제 예르지 포페유슈코(Fr Jerzy Popielusko) 신부의 말이다. 그의 이러한 질타는 세속의 권력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범기독교 내에 들어와 있는 종교 정치꾼들의 야비함과 무자비함을 겨냥한 것이다. 교회들 간에 세력 다툼이 벌어지는 21세기 종교는 세속 권력마저 끌어들여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모습이다. 합법화와 정당화의 논리를 종교적 명분에서 찾고 있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종교적 이념을 빙자한 사리사욕이 그 세계를 지배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서구의 전통 가톨릭은 권력 투쟁에 휩싸인다. 교황의 일인 독재체계가 흔들린다. 이 상황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통치 기구를 만들려는 세력 간의 권력 투쟁 양상이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교회 역사가 맥클로흐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의 세력 다툼이 전개되는 동안 같은 양상이 미국 남침례교와 호주 장로교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450) 종교적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려는 종교 정치꾼들의 권력 투쟁의 최대 피해자는 순진한 무지렁이 신도들이고 교인들이다. 사리사욕에 찌든 종교 정치꾼들의 권력 투쟁 자금은 바로 무지한 성도들이 신께 바친다고 드린 헌금과 제물이다. 그럴듯한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무지한 성도들에게 주입하고 그들이 내는 헌금을 자금력으로 삼아 종교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종교적 문화전쟁’(450)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전쟁인데 상대방을 죽이는 방식이 때로는 무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합법적으로 보이는 권력 기구를 장악하는 방식이다.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다든지 성공회 수장이 된다든지 총대주교의 자리를 탐한다든지 총회장이 되려고 한다든지 등 현대는 대개 문화전쟁의 성격을 띤다. ‘피 흘림 없는 쿠데타’(451), 이것이 종교적 문화전쟁이다.

전쟁은 반드시 승자가 있기 마련이며 패자의 굴욕과 희생은 필연적이다. 종교적 투쟁의 첫 번째 목표는 세속 권력의 왕궁(王宮)과 같은 부동산 자산이다. 웅장한 성당이나 거대한 예배당을 우선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지배권을 장악한 자가 새로운 법을 만들어 사리사욕을 합법화하고 정적(政敵)들을 숙청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세력 확보를 위해 종교적 이념을 도구로 사용한다. 현대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동성애 합법화/불법화 논쟁’에 불을 지피는 경우다. (이 사안의 쟁점은 논외로 하고) 우선 집어야 하는 점은, 종교 권력은 자신의 세력화를 위해 반드시 모든 종교적 진리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미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맥클로흐는 이러한 종교적 문화전쟁의 갈등과 충돌 이면에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지, 또는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452)이 항상 과제로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종교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은 이러한 본질 문제를 다만 이용할 뿐이다. 그들의 목적은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구소련 체제가 붕괴되자 가장 먼저 러시아로 입국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미국의 개신교 전도자들이었다. 동기야 복음 전도였지만 타도 대상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였다.(454) 이것이 바로 종교적 문화전쟁의 대표적 사례다. 또 다른 예가 1990년대 과테말라 내전에서 그대로 반복한다. 오순절주의의 영향을 받은 당시 리오스 몬트 정권은 원주민에 대해 인종학살을 방불하게 하는 참혹한 살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오순절주의자로 개종시킨다.(454) 이러한 방식은 21세기 종교적 권력 다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양이든 한국이든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것이 ‘종교적 문화전쟁’이다. 반복하지만, 희생자는 무지렁이 신도이고 교인들이다. 절대진리 성경을 제대로 배워야만 하고 성경대로 가르쳐야 하는 책무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신도들의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바로 서로 대립하던 종교 세력들이 합하면서 더 큰 종교 권력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 일이다. 가령 복음주의 세력과 오순절주의는 성경관에서부터 대립했다. 하지만 오순절주의는 우선 로마 가톨릭의 은사주의와 연계하였으며 다른 종파들도 성경권위 대신에 오순절주의의 은사 체험을 위해 성경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이 벌어진다. 매우 자의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극대화하므로 성경권위는 사라진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고속도로 표지판이나 자동차 운전 교범이 아”(455)니다. 자신의 종교적 영성을 스스로 관리하기 위한 유용한 정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로마 가톨릭부터 복음주의 진영까지 두루 잠식한 오순절주의에서 성경권위는 고사하고 강단 설교자의 필요성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음껏 소리 지르고 펄쩍펄쩍 뛰며 온몸을 떨면서 자신의 신과 만나고 있는 자에게 차분하고 냉철한 성경진리가 절대적 권위로 전달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현재로서는 로마 가톨릭의 엄격한 종교적 의식마저 무력화시키는 오순절주의는 불특정 다수의 종교 권력자들을 위해 새로운 종교적 표현 양식이자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는”(456) 유용한 도구다.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하며 신도들에게 천국을 대신할 대안을 이 세상에서 찾게 하고, 그리고 이 신도들을 이용해 지배 권력을 확보하는 것이 종교 권력자들의 목표다. 이것이 종교적 문화전쟁의 핵심이며 이 전쟁에서 나약하고 무지한 신도들은 더 큰 희생양으로 전락할 뿐이다. 동서양에서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 성경권위가 추락하는 종교적 문화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종교 권력가들은 더 교묘하게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으며 신도들은 그 희생양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아합왕과 이세벨의 폭정에 혼자 남았다고 절규하는 엘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롬 11:4)고 응답하신다. 이는 이 시대를 내 마음대로 정죄할 수 없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다.


<230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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